<해석의 갈등> - 만발하는 미학
자기도 모르게 그 의미를 품고 다니던 자가 그 의미를 의식했을 때, 그 환자는 '자유로워져야 한다.' (p.180, 프로이트 맑스 그리고 니체)
사람은 우주의 주인도 아니고 생명체의 주인도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심리의 주인도 아니다. (p.182, 관념의 숲, 코페르니쿠스/다윈/프로이트)
무언가가 사람을 끊임없이 뒤로 잡아끌지 않는다면 유아기는 운명이 아닐 수 있다 (p.186, 프로이트의 자유)
진짜 비극은, 그런 일을 남의 일처럼 비난하지만 그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p.187, 오이디푸스와 나르키소스)
먼저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사람은 잘못 정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p.188, 사리자)
사람은 뜻있는 행적을 통해 유아기에서 벗어난다. 뜻있는 행적은 문화로 열매를 맺고 문화는 미래로부터 그 의미를 찾는다 (p.206, 파이데이아)
뜻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나오는 자는 없다. '희미한' 희망은 슬픔의 사막을 거쳐야 한다. (p.207, 휘브리스에서 데카당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지닌 힘은 연약해서, 그 연약한 힘 대신 전이가 들어선다. (p.212, 예술)
사회는 늘 어떤 관념을 현실로 생각하고 개조를 꿈꾼다. 믿음을 관념화해놓고 그것을 실천해 얻은 현실을 거기에 연결해서 거짓을 꾸민다. (p.219)
욕망이 그 전능한 힘을 잃었을 때에만 현실 원칙은 우리의 능력에 대한 답이 된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욕망만이 사물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그런데 영생의 환상은 욕망이 전능을 보존하려고 의지하는 마지막 피난처이다. 오직 단념할 수 있는 욕망 또는 현존재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는(die schwere des Daseins zu ertragen) 욕망만이 사물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문명과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p.226, 제행무상과 공 그리고 화엄 - 춤!)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과 똑같지 않은가? 당신의 사랑이 젊음을 되찾으면 의지도 정의를 지닐 것이다. 법이 아닌 은총에 의해서 (p.226)
시인은 뛰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 역시 몽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에 엄청난 양의 정서(Affektbetrage)를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 작가와 몽상>, p.83 ; SE, IX, p.144). 놀이에서 '환상'으로 간다. 적당히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의 관계가 있다고 전제한다. 사람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대체물을 만들어 다른 것과 바꾼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노는 것 대신 환상을 끌어들인다. 그런데 놀이를 대신하는 기능을 지닌 환상은 대낮에 꾸는 꿈, 곧 몽상이다. (p.230, 몽양)
프로이트는 환상의 연쇄고리를 이루는 두 축을 꿈과 시로 본다. 두가지 모두 똑같은 운명을 증언하고 있다.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가득찬 인간의 운명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몬상의 환상(phantasien)을 움직이는 힘이고, 모든 환상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동시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현실을 바꿔 보는 것이다" (<창조적 작가와 몽상>, p.86 ; SE, IX, p.146) (p.230, 이노센티카와 서사적 주체, 입법 주체)
순수 무의식의 환상과 달리 몽상의 환상은 현재의 인상과 과거 유아기와 미래에 투사된 실현을 모두 아우를 수 있다. (p.230, 총첩차삼)
양심의 가책이나 수치심 없이 자신의 환상을 즐기는 것, 그것이 예술작품의 목적이다. (p.231, 이노센티카)
(정신분석학의) 두 번째 단계의 과제는, 억압된 것과 억압하는 것을 밝혀가면서 뒤에 숨은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표(시니피앙)의 운동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기표의 운동은, 욕망의 결핍된 기의에서 출발해 환상을 문화세계에 내놓는 작품으로 간다. 그리하여 환상을 미의 현실로 창조한다. (p.240, 방유리병중지붕)
동기에서 표상으로 전환하는 것은 행위가 덜 이루어진 것임을 전제로 한다. 동기는 그처럼 덜 이루어진 행위의 표현이다. 그런데 진짜행위, 완전하게 이루어진 행위, 곧 의식의 인과관계가 뚜렷한 행위는 없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한다. 우리의 결정은 모두 그처럼 완전하고 구체적인 행위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 행위가 덜 된 행위임을 우리의 노력이 증명한다.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행위가 부족함을 뜻한다. 완전히 이루어진 행위는 피로와 고통도 없고 노력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꼭 들어맞지 않는다. (p.246, 열린결말. 나르키소스와 신앙심)
절대 선택(플라톤, 칸트, 헤겔)은, 덜 된 행위가 결정주의 표상 속으로 은폐하는 데 대한 대응이다 (p.247, 미숙아, 알튀세르)
표상의 법칙, 곧 오성의 수준에서 찾은 해결책은 부분 해결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와 이성의 관계를 온전히 제대로 그려내야 한다. (p.248, 형용사의 세계)
실존이 자기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에서 반성의 통로가 다양해진다. 바로 거기서 철학은, 세상과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실존의 기호를 거쳐 원래의 긍정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바로 거기서 철학은 윤리학이 된다. 스피노자는 존재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윤리라고 했다. (p.250 테오디세와 코스모디세)
순수한 자아의식이 이미 세상 쪽으로 몸을 굽혀 구체적인 의식 안에서 만족의 척도가 되는 동시에 행위의 원칙과 규범이 되고자 할 때 비로소 가치가 등장하며, 그 가치는 실존의 각도에서 실존을 위해 존재한다. (p.250, 애착형성과 기민한 신경증으로서의 철학)
창조가 용솟음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지속이다. 그러나 작품(예술)은 지속 뒤에 남아 운동을 멈추고 우리 눈에 들어오며, 우리의 사변 대상이 되고 모방할 본질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시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동기나 가치 문제에서 드러내면서 숨기는 운동을 하나의 낱말로 요약해야 한다면, '현상'이라는 말을 써야 할 것이다. (p.252, 현상학의 바탕으로서 해석학, 질의 연장과 가면이라는 필연, 그끝에 형용사-꽃-화엄, 베르그손)
우리가 거래하는 세상 전체와 모든 존재자는 해독해야 할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p.253, 나베르의 프랑스 백과사전, p.98)
딱, 떨어지는 형태로 정해진 무엇이라기보다는 도전을 받을 때마다 자기 모습을 갖추어가는 어떤 사고방식이다. (p.266, 화쟁)
의식 차원을 뒤로 미루는 것이 (정신분석)작업의 시작이다. 의식'으로' 환원하지 않고 의식'을' 환원한다. 그런 점에서 현상학과 반대이다. (p.267 라캉)
무의식은 자아의 '가장 밑'에 있기도 하지만 '가장 높은 곳'에 있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무의식은 억압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도덕 명령을 내리는 복잡한 과정을 겪기도 한다. (p.268 주이상스 = 수면, 무의식 = 호수)
대상 카덱시스 대신 동일시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대상이 자아 내면에 다시 생기는 것이다. 그처럼 잃어버린 대상과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바뀐다. '승화'의 핵심이 바로 그 과정에 있다. (p.269, 투사의 나르키소스, 불열된 코기토)
코기토 에르고 숨의 형식적인 진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그런 환상, 곧 나르시시즘이다. 반성철학의 코기토와 직접 의식의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그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즘 때문에 나는 내가 믿는 대로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p.272, 만법가지대탈)
기호론 체계는 '분절'을 이루는 조건들의 집합이다. 그런 분절 없이 언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분절된 것은 아직 뜻하는 힘을 지닌 언어가 아니다. 오직 체계들의 체계일 뿐이며 우리는 그것을 랑그라고 부른다. 잠재하는 그 랑그가 말을 가능하게 하지만 랑그는 말의 마디마디에만 존재한다. 잠재태와 현실태, 분절과 활용, 구조와 기능의 차이이다. 또는 다른 데서 말한 대로 체계와 사건의 차이이다. 이와 같은 뜻의 이론을 주체이론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p.284 미분적 역학과 적분적 위상학의 누승)
랑그 차원의 대명사는 누군가 그 텅 빈 기호를 자기 것으로 삼아 랑그를 말로 바꿀 때 그러한 전환의 도구로 쓰이기를 기다린다. (p.286 용공지쟁, 벤베니스트의 오류, 가벼움에 대해)
세상이 스스로 드러나듯이 주체도 스스로 등장한다. 대명사와 지시사는 그와 같은 등장과 드러남에 이바지할 뿐이다. 주체의 등장과 세상의 드러남은 언어 이전이요 언어 너머이다. (p.287 소쉬르 비판)
구조주의에서 볼 때 현상학이 의식에 부여한 절대 특권은 절대 편견이다. (p.288 만법가지대탈)
말이 나가는 순간 주체가 스스로를 가리킬 수 있게 되는 조건이 또한 환원이다. 적극성과 주체성은 함께 간다. 앞에서 우리는 세상이 드러나는 것과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 같이 일어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지시하는 것과 자기를 지시하는 것도 함께 일어난다. 말을 하면서 주체가 끼어들어 주체의 모습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현실을 겨냥하거나 진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p.292 인타라망, pas)
상징은 단순히 수학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 형태를 띠고 있으며, 주체들끼리 서로 인정하는 법칙을 품고 있다. (p.292, 기우제와 축제, 아우라, 대넷의 체스판 - 파스칼의 주사위 놀이)
의미관계가 힘관계를 표현하는 동시에 힘관계는 의미관계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또한 은폐된다. (p.295, 용공지쟁, 니체의 부정)
존재하려는 욕망과 노력이 나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러한 욕망과 노력은 기호 해석이라는 먼 길을 지나 의식된다. (p.296 이노센티카를 향한 정주)
존재하려는 욕망을 내 것으로 삼는 일은 짧은 의식의 길로는 불가능하다. 기호를 해석하는 긴 길만이 열려있다. 그것이 내 철학 작업의 가설이다. 그것은 나는 '구체적인 반성'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기호 세계에 의해 매개된 코기토'이다. (p.296, 애어문수관음보현, 구도자와 사리자)
기표를 존재자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p.296, 나르키소스, 시간의 3가지 종합)
기호가 세상에 대해 두는 거리 또는 세상이 빠진 언어는 좀 더 적극적인 관계를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는 말하고 싶어한다. 가리키고 드러내며 존재로 나아가려고 한다. 기호에 현실이 빠지는 것은, 기호가 현실에 다다르고 다시 만지고 접촉하면서 스스로는 사라지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언어가 존재에 속함으로써 관계는 바뀌어버린다. 언어는 존재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p.297 차원과 시차의 문제, 불능승수존지경고야)
죄는 내면의 운명이다. 그래서 구원도 밖에서 오고 저쪽에서 온다. 사람의 책임이나 인격에 관계 없이 순전히 마술과 같은 힘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 악을 실체요 세상이라고 봄으로써 신화는 단순히 신화가 아니라 '사실'이 된다. 그것은 잘못된 앎으로 앎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악의 문제에서 영지주의는 머릿속 그림을 사실로 보고 상징을 실체로 본다. 그렇게 해서 서구 사상에서 가장 현란한 교리신화가 생긴다. '영지'라고 하는 현란한 이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p.304, 만법가지대탈)
상징을 다시 찾는 것은 예전의 꿈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언어가 막 발생하는 지점에 다가가는 것으로, 처음부터 철학에서 시작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p.321, 계보학)
첫째, 어둠에 묻혀 있긴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이야기되어 있다. 둘째, 그러나(pas) 우리 생각으로 다시 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상징에 묻힌 생각과 그것을 생각하는 생각을 함께 이해하려는 것이다. (p.322 왜 꽃은 피고 지는가, "상징(agape)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흠의 상징이 풍부한 덕에, 어둠 속에 있던 체험이 말이라는 빛으로 나온다. 사실 처음부터 흠은 때 이상이다. 거룩한 존재 앞에 선 인간 전체의 느낌을 가리킨다. 느낌을 주도하는 그 무엇은 몸을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깨끗하게 하는 정화 의식은, 여러 가지 몸짓을 통해(파묻고, 침을 뱉고, 멀리 집어던지고) 상징 언어 말고는 어떤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온전함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p.325 용공지쟁, 아랫 단락 '타락의 신비')
신화를 서 있는 상태로 보지 말고 움직이는 상태로 봐야 한다. 신화들끼리 비밀스럽게 어긋나고 어울리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p.328 들뢰즈의 이념론)
신화들은 끊임없이 서로 투쟁한다. 한 신화는 다른 신화의 관계에서 우상파괴를 일으킨다. 상징은 원래 자기 혼자 고립되면 우둔해져 우상숭배에 빠진다. 그러므로 그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 그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상징은 스스로를 극복한다. (p.328 니체 선악의 저편)
결국 뱀의 존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악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악이 눈에 띄었다. 사람은 악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악을 계속 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뱀은 사람의 탐욕보다 더 오래된 악의 전통을 상징한다. 뱀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다른 '타자'이다. (p.330 나르키소스)
아담 신화는 비극 신화를 파괴하며 생겼지만 다시 그것을 품고 있다.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거듭 무찔렀지만 비극이 아직도 살아남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비극의 신학이 생각으로 풀리지 않고 말이 될 수 없지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백하면서 슬픈 최후를 맞는 영웅담 속에 계속 살아 있다. (p.331 유리병)
현상학에서 상징 세계의 일관된 체계를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진리이고, 거리를 둔 진리이며, 환원된 진리이다. 내가 그 진리를 믿는 것인지 또는 그런저런 상징의 뜻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빠져 있다. 비교하는 차원, 곧 자신이 어디에 속하지 않고 이 상징에서 저 상징으로 옮겨다니는 차원에서는 그런 물음이 생길 수 없다. (p.332 a0의 유혹, 앵무새, 에코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인간은 지성으로 상징을 풀면서 의미를 얻는다. 상징은 격렬한 움직임과 전투를 통해 스스로를 넘어선다. 해석학은 바로 그 싸움에 참여한다. (p.333 해석과 반성의 관계1, 생멸로부터의 진여, 이노센티카를 향한 정주)
이해하려면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해석하는 사람은 자신이 밝히려고 하는 텍스트가 지닌 뜻의 '후광'을 입지 않고는 그 뜻에 다가갈 수 없다. 그 뜻의 기운 속에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해해야만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p.333 해석과 반성의 관계2, 합일될 수 없는 합일, 유리병)
이야기는 겉옷에 불과하다. 벗어던지면 그만이다. 속뜻, 곤 철학적의미가 이야기에 앞서 이미 있고, 이야기는 진리가 단순하게 보이지 않도록 진리를 덮고 있는 보자기에 지나지 않아서 공연히 진리를 가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내 신념은 그렇다. 상징 ‘뒤’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부터 생각하고 상징에 ‘따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상징의 실체가 파괴되지 않는다. 상징은 사람들 사이의 말을 ‘드러내는’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p.334 해석과 반성의 관계3, 만법가지대탈, the time is out of joint)
영지주의자들이 볼 때 악은 밖에 있다. 사람 밖에서 사람을 누르는 어떤 물리적 실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악의 모습이 실재하는 무엇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푸에치가 말하듯이 공간과 우주의 형성과 분리되지 않는 교리신화가 생겼다. (p.335 힘과 강함은 다르다. 코스모디세의 테오디세 추월)
형식주의를 통해 칸트는 이미 플라톤에서 시작된 운동을 완성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보았다. 만일 근본악의 형상이 ‘불의’라면, ‘정의’는 여러 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덕의 형식이며 여러 덕을 하나로 묶는 원리가 된다. (p.338 동일자와 대립자의 연결, 뉴턴 미분의 한계, 구심력만이 작용하는 세계. 등가성에 시제성이 결여된 세계)
준칙의 역전에서 악을 찾는 칸트의 생각은, 악을 떨어짐에서 찾는 성서의 생각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이렇다. 최고 악은 무슨 의무의 위반이 아니라 덕이 아닌 것을 덕으로 보는 것이라는 점, 그 점을 철학 언어로 완벽하게 말한 사람이 칸트라고 나는 본다. (p.339 생명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칸트, 욕망의 결핍으로부터 발생한 노예도덕의 사회화로서의 자본주의와 국가이념, pas - 관음적 유희의 결여. 파르시팔보다는 차라리 체사레 보르자(Plutôt César Borgia que Parsifal)))
악을 윤리적 관점에서 풀면 어디에 도달하는지 이제 뚜럿하게 보인다. 자유란 떨어질 수 있음이며 순서를 뒤집을 수 있음이다. 악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역전이다. 아주 명확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뭔가 허전하지 않은가? 승리했지만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분명한 결론은 내렸지만 깊이를 잃었다. (p.340 스피노자(ne-pas 결합)와 헤겔(ne의 마술사))
아담은 단지 하나의 표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 그리고 아담보다도 먼저 있던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뱀이다. (p.340 조숙아적 운명과 문화를 가장한 구조적 폭력)
원죄 개념은 원래 영지주의와 싸우기 위해 생겼는데 그 형식이 서로 비슷해졌다. 여기서 우리가 반성을 통해 해야할 일은 첫째, 원죄가 지식으로는 거짓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그다음, 이미 있는 악을 말하려는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다. 원죄는 이미 있는 악을 말하기 위한 합리적 상징이라는 것이다. (p.342 존재지의 요건으로서의 서사)
원죄는 불가피하게 개념이지만 “그 개념의 기능은 우연의 구도에 유전의 구도를 집어 넣는데 있다.” 그것은 빼놓을 수 없는 형이상학의 문제인데 개념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p.343 서사의 충분조건으로서의 나르시시즘)
그리하여 개념 아닌 개념(원죄)을 통해서 ‘거듭남이라는 대칭항’이 생기게 되었다. 그 대칭항에서 의지는 사려 깊은 선택을 하지만 수동적인 것으로 등장한다. 바로 그 거듭남을 칸트는 도덕 생활의 ‘아프리오리’로 삼으려고 했다. (p.344 d(a) -> a / 관료주의적 영원성과 앵무새의 탄생, 아우라가 거세된 상징으로서의 원죄 개념)
“그러므로 도덕적인 악의 최초 근거로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p.345, 칸트 인용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 pas의 거부 - 드라우파디의 진솔함을 뿌리친, 그야말로 폭력기구의 양태로서 구조주의)
인간의 마음과 주체로움을 말하는 상징 세계는 처음부터 우상파괴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징의 여러 기능 가운데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기능을 다른 기능들에서 뗴어놓기 때문이다. 다른 기능이란 우주의 밤과 꿈과 시를 다루는 기능을 가리킨다. 주체의 상징은 온전한 상징 세계 전체에서 떨어져나오면서 이룩된다. 그런데 상징은 우주와 실존의 차원을 모두 아우르지 못할 때 건조해지기 시작한다. (p.346 코스모디세로부터의 도약, pas-그럼에도 불구하고, 탈궤도로서의 revolte, 니르바나의 결을 끊는 입속의 검은 잎, 아스팔트에서 꽃이 피고 지듯이)
비극이 윤리에 저항한다기보다는, 윤리로 풀 수 없는 요소를 비극의 형태를 빌려 표현한다고 보는 편이 낫다. 앞에서 보았듯이 비극의 인간론은 비극의 신론과 뗄 수 없는데, 이 비극의 신론이란 결국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말의 형태를 빌리는 것이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비극을 제대로 말하려면 철학은 죽는다. 비극의 기능은 든든함과 자기 확신과 비판 정신을 의문에 부치는 데 있으며, 악의 책임을 통째로 짊어지려는 도덕의식을 문제시하는 데 있다. (p.347 온누리가 집이라지만 퍼덕이는 날개죽지 끝에 향해가는 운명/ 둥지도 새장도 아닌 자유 끝에 찾은 단 하나/ 나의 하나님/ 자유와 사랑으로 속박을 풀어 해친 끝에 마주한 운명, 비극, 고통/ 하지만 양팔 벌려 조우하는 자신만의 신성/ 나의 하나님, 새, 허공,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자유 그리고 사랑 ; 이노센티카를 향한 정주, 파르시팔보다는 차라리 체사레 보르자를!)
자유 안에 이미 죄가 들어 있으므로 죄의 책임을 인간의 자유로 돌릴 수 없다는 점을 말한다. ‘여기서는 알레고리 방식의 환원이 없다. 오히려 악의 문제에 ‘신’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한다. 윤리적 세계관에서는 신을 심판자로 보지만 여기서는 신에게 악의 혐의를 둔다. 고발하고 심판하는 법률주의에 맞서 욥의 하느님은 ‘폭풍 한가운데서’ 말씀하신다. (p.347 양팔 벌려 조우하는 자신만의 신성)
악의 상징은 악이 존재구조라는 점 역시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악은 존재의 모험이며 존재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p.347 대당서역기, 우담바라이든 풀잠자리 알이든 결국에 피어내는 꽃, 화엄)
종말에는 흠을 정화하고 죄를 용서하고 허물 있는 자를 의롭다고 봐준다. 위대한 신화들은 모두 처음(태초)과 함께 나중(종말)을 말한다. (p.348 무상 부패 사랑에 대하여)
필연성, 그리고 현실 전체, 그러나 아직 어떤 필연성인지 또 어떤 전체인지는 모른다. 우리가 이제부터 따져볼 필연성의 도식은 이상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여야 한다. 곧 필연성은 나중에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에서 보아야 악의 필연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필연성은 악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인정되어야 한다. (p.348 아낭케, 나타라자, pas의 역량)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p.349, 성 바울 인용 <로마서> 5:20, 아수라 발발타)
플로티노스는 사람이 자신의 육체에 빨려드는 나르시시즘의 유혹을 하나의 법칙으로 보고 있다. (p.349 인타라망)
섭리를 다룬 마지막 논물들(iii, 2~3)속에서 플로티노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스토아학파의 필론을 거쳐온 로고스 개념을 들고 주장하기를, 부조화에서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무질서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섭리는 악을 낳지 않았고, 악을 낳지 않은 섭리는 악을 부린다. 방해가 있음에도 조화가 이루어진다. 악에도 불구하고 선이 이긴다. (p.350 ‘d1 to a2’로서 코스모디세-이노센티카의 결합. 若人修道道不行, 萬般邪境競頭生)
존재가 드러나고 팽창하는 운동 속에 어떤 상반 법칙이 있다. (p.350 용공지쟁)
부정성이란 힘과 죽음과 투쟁과 잘못에서 개체와 보편이 역전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속과 겉이 바뀌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모든 부정성들은 하나의 부정성으로 모인다. (p.351 ne의 역량으로서의 空 - 침묵 - 부패)
죄의 사면 문제를 철학적 조화의 화해로 바꿈으로써 절대지로 끝난다. 그리하여 정당하지 않은 악이 없으며, 화해에서 은총의 문제도 사라진다. (p.351 ne는 발산 혹은 수렴 - 공에서 공으로의 이행, ‘서사의 누적-이노센티카’의 결여)
비극적인 악 - 이미 있는 악 - 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생성되는 존재’ (devenir de l’être)를 생각할 수 있을까? (p.352 애어문수관음보현)
먼저, 악에도 ‘불구하고’ 화해가 일어난다. (p.352 pas와 아낭케)
둘째, 이 ‘불구하고’는 ‘은총으로’이다.
(p.352 아폴론 대 바쿠스, 미륵 대 지장, 메시아 대 예수, 헤겔 대 니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분명하게 말한 대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etiam peccata)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그리고 클로델(claudel)이 부드럽게 말한 대로 ‘최악의 상태는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숨어 있다. 거기에 절대지는 없다. ‘불구하고’나 ‘은총으로’에 절대지는 없다. (p.352 부조리주의로서 반항하는 인간, 초극의 길로서 초인, 똥막대기)
끝으로, 속 깊은 이야기의 샛째 범주는 ‘더욱더’이다. (p.352 puissance - qualia)
악은 ‘존재’의 구조이다. 그 점에서 필연성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존재는 ‘생성되고’ 있다. 과정에 있다. 그것은 내 자유의 영역이다. 내가 하기에 따라 악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악이 존재의 구조가 된 것은 내 책임이다. (p.352 로고스의 기적에 대한 주석, 囚에서 因, 寵)
낡은 신정론에서는 거짓 논설을 펴기 위한 방편이던 필연성 문제가 희망의 앎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찾는 필연성은 그 희망의 앎에서 생기는 가장 높은 차원의 합리적 상징을 이룬다. (p.353 아낭케, 假之戴脫 - 放琉璃瓶 / 당위-정언- d(a) to a, 효율-가언-모나드와 클리나멘의 결합 ; d2)
실존적 의미는 문자 의미를 통해 유비 형식으로 간접적으로 주어진다. 악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그 악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상징을 해석하는 것이다. (p.354 a0 to a1, 정든 유곽, 시어적 연결로서 형용사의 세계, ne(미분)와 pas(적분)으로 발산하는 자유정신)
악의 상징은 구원의 상징과 짝을 이루어 발생한다. 부정함은 순결과 짝을 이루고 죄는 용서와 짝을 이루며 허물과 노예는 해방과 짝을 이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처음 이야기는 끝, 곧 종말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p.355 明頭未顯暗頭明)
불투명함, 문화에 의존하고 있음,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 반성이 지향하는 명확성과 필연성과 과학성에서 볼 때 상징이 지닌 세 가지 결점이다 (p.356 차례대로, t3 영원회귀 a2/ t2 나르키소스 d2/ t1 아비투스 a1, 즉 시간의 종합 3가지 차원의 문제)
- 밑의 초월, 정신분석학(회자정리 d2; 프로이트와 라캉) ; 현상으로부터 활동기능, 즉 ‘물질과 기억’의 영역/ 환상(illusion)/ 상징의 히스테릭(억압된 것의 회귀, 상징계의 몽고반점)/ 망각의 이편(므네모시네)
- 위의 초월, 종교현상학(거자필반 a1; 독일계통, 헤겔과 후설, 하이데거, 엘리아데) ; 현상으로부터 지향대상, 즉 ‘기술’의 영역(거룩함-로고스)/ 합일될 수 없는 합일로서의 세계 내 존재로서 상징과 기호의 모순, 즉 관계에 기초한 형용(거룩한 것의 회상)/ 상징의 충만함/ 망각의 저편(에로스)
정신분석의 관점은 충동의 ‘경제학’이다. 다시 말해서 포기와 만족의 불균형이다. 현실일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으며, 대체될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는 그런 포기와 만족의 균형을 통해 ‘모든 것’을 본다. (p.359 외재화된 모유)
종교는 대체 희생물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개인의 죄의식을 덜어주어 신경증세를 줄인다(그 대신 집단 신경증이 생긴다). 그런가 하면 종교는 희생 제물과 화해를 인도해 위로의 기능을 담당한다. 끝으로 종교는 기쁨을 주는데, 그것은 에로스라고 하는 근본 충동이 승화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p.359 경제 관점에서의 문명, 자본주의-기독교-국가기구의 연쇄로서 생명정치와 면역학)
존재론적 이해는 모든 이해에 존재의 전이해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거룩의 상징 해석은 옛 회상 이론을 새롭게 들고 나오게 된다. 그런데 정신분석에도 회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환상’이 만들어지는 길을 따라 생겨나는 회상이다. 종교 환상은 원시인들이나 어린아이의 최초 갈등을 표현하는 상징과 환상(fantasm)에서 시작된다. (p.360 비극의 필연성, les non-dupes errent)
프로이트 이후, 의식은 마지막에 알아내는 것이지 처음부터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도달해야 한다.(p.361 기민한 신경증으로서의 철학)
프로이트가 비신비화(démystification)하는 분석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던 것은 의식의 특권을 깨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p.361 역학적 단면으로서의 의식 - 경화된 표층의 무의식, 서사주체 - 不識文殊觀音普賢爲異 亦不以爲同)
이제 우리는 애석하지만 의식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무의식이라는 타자와 함께하는 모습으로 의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p.362 삼중의 미메시스와 베르그손의 원뿔 결합 - 미적분상 차원과 벡터의 문제 - 푸리에 변환과 해석학)
“의식은 직접이 아니라 간접이다. 의식은 기원이 아니라 과제이다, 늘 더 의식해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p.362 프로이트 인용, 존재 = x, 앎은 연기(acting)된다.)
정신은 형태들이 지닌 변증법의 산물이다. 여러 제도나 예술 작품이나 문화의 객관 구조에서 그러한 변증법운동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의식’은 변증법 운동을 내면화한 것일 뿐이다. (p.363 단, pas의 전제로서 데카당스-제행무상이 밑천이 되어야. 안그러면 d(a) to d(a)에 불과한, 열평형의 세계)
스토아주의는 주인과 노예의 상호인정을 말한 점에서 진리이지만, 주인과 노예의 차이를 완전히 없앤 회의주의가 스토아 사상의 진리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그렇다. 어떤 순간 진리인지 진리가 아닌지는 다음 순간에 달려 있다. 앎은 항상 끝에서 처음으로 생긴다. (p.364 어제의 내일이 되어)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유아기에 갇혀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무의식은 모든 퇴행과 정체의 원인이다. 아주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결국 정신은 맨 끝이고 무의식은 맨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똑같은 상징을 놓고 두가지 해석이 가능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나는 ‘뒤’에 있는 형태들을 자꾸 끌어올리는 쪽으로 해석하고, 다른 하나는 ‘앞’에 있는 형태들을 자꾸 등장시키는 쪽으로 해석한다. 똑같은 상징이 이 두 차원을 모두 품고 있으면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해석을 한다. (p.364 d2, 나타라자의 유희가 결여된 생각. 유디스티라; 뻔한 속임수에는 속아 넘어가주는 수 밖에. '어제의 내일' 처럼 형용사의 세계인 이상, 끝없이 모나드는 클리나멘으로 들끓기에, 화학적 결합이 일어났다 떨어졌다 반복하며 질의 연장, 유기물-코아세르베이트 전이 과정을 그리기에.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논의하고 사고하는 형식으로서의 서사,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축복 속에 모든 것을 가지는 새의 정신. 눈이 멀어야 사랑하는 것처럼.)
제1진리는 - 나는 존재하고 나는 생각한다 - 는 거스를 수는 없지만 추상적이고 텅 비어 있다. 제1진리는 그것을 객관화하는 표상과 행위, 작품과 제도 그리고 기념물을 ‘거쳐야’한다. 그 대상들 - 넓은 의미에서 - 속에서 ‘나’는 나를 잃고 다시 찾는다. (p.365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반성은 앎과 의무의 올바른 자리를 잡아주는 것(justification)이라기 보다는 존재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인식론은 이 큰 과제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행위와 나의 자리를 나의 많은 작품들 속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내 것으로 삼음, 또는 다시 내 것으로 삼음(appropriation - a1 to a2)이다. 한 번 잃은 것을 다시 찾는다. 내 것이기를 그쳤던 것을 ‘나름대로’ ‘내 것으로 삼는다.’ 시간과 공간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방심이나 잘못된 망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삼는다. 결국 반성을 시작하는 최초 상황은 ‘망각’이다. 나는 대상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며 나의 존재 중심에서 떨어져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듯이 말이다. 거기에 무슨 비밀이 있든 간에 결국 디아스포라, 흩어짐과 떨어짐 때문에 나는 나를 소유하지 못한다. (p.367 카뮈의 <이방인> a1 그리고 <페스트> d2, <반항인> a2 - 꽃은 제 살같이 터져라 피지 않던가? 앗기고 앗기어도 내줄 수 없다가 만발 하는 그제야 내주고 아끼는 눈부처, 불륜의 미장센, pas의 역량, 믿지도 잃지도 않는 길 위에서 눈이 멀어 빛을 듣는 형용사의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기위해 피는 꽃. 아낌 속에 피어나는 이야기./ 아직 ‘주어져 있지(gegeben)’ 않고 ‘과제로 주어져 있다(aufgegeben)’.)
스피노자는 철학의 완성을 ‘윤리’라고 불렀다. 철학은 소외로부터 자유와 행복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윤리이다. (p.368 푸른 하늘을)
플라톤은 인식의 원천을 에로스(Eros), 곧 욕망과 사랑에서 찾았고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곧 노력에서 찾았다. 노력은 욕망이다. 왜냐하면 노력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욕망은 노력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단순히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개별 존재자의 적극적인 자리매김이기 떄문이다. 노력과 욕망은 나는 있다고 하는 제1진리 속에 자리 잡아 나의 양면을 이룬다. (p.369 물질과 기억, 누승과 멱의 원리)
‘반성은 존재하려는 노력과 욕망을 증언하는 작품들을 통해 그 노력과 욕망을 내 것으로 삼는다.’ (p.369 인타라망)
세상에 흩어진 기호 말고 다른 곳에서 존재 행위를 파악할 수는 없다. (p.369 시차와 차원, 모나드와 클리나멘, 오해와 착각, 고통과 비극, 소외와 억압)
반성은 불투명한 언어를 이루는 상징들 속에서 자기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상징들은 개별 문화 속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어서 해석도 다양하다. (p.369 a1(若人修道道不行 - 萬般邪境競頭生) - d2(萬法假之戴脫) - a2(智劒出來無一物 - 明頭未顯暗頭明))
둘 다 의식의 콧대를 낮추고 의미의 원천을 중심에서 쫓아낸다는 점이다. (p.370 d1)
나의 ‘의식'은 나의 ‘인식'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를 의심하며 간접적으로 안다. 그런 식으로 반성은 모든 직접 의식과 멀어진다. 직접 의식은 오직 중상일 뿐이며 그래서 바깥의 중언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의식이 우선 거짓 의식이라면 반성은 의식의 중심 분산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서의 말을 빌리자면,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p.371 萬般邪境競頭生 - 殺龍而卽生龍)
두 상징 세계가 엉켜 있다. 거룩의 예언자적 의미들은 원초신화의 흔적 위에서 뭉치고 활동한다. 앞으로 가는 상징은 뒤로 가는 환상과 별개가 아니다. 무의식의 원초 신화 속에서 새로운 거룩의 상징들이 몸을 일으킨다. 의식의 종말론은 언제나 의식의 고고학의 창조적 반복이다. 프로이트 자신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있던 곳에서 내가 되어야 한다(Wo es war, sollich werden)
(p.373 합일될 수 없는 합일)
포기에는 욕망이 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도덕 양심과 우울증 구조의 닮은 점이 분명해진다. 그처럼 경제관점에서 보면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잃어버린 원초적 대상의 각도에서 도덕행위를 볼 수 있다. (p.378 초자아와 안티오이디푸스)
형태의 대체를 통한 ‘발생’의 계보학 (정죄의 해석학)
1. 근본 구조이자 돌이킬 수 없는 운명.(양은 질의 연장)
2. 2차 산물로서의 형식 법칙 (자기 합리화의 과정)
3. 초자아의 억압 체계로서의 ‘경제’ 효과 (반발력 작용 - ne)
4. 모순자의 중첩 (아버지 - 위로와 억압의 기능)
벌을 받는데 대한 두려움과 위로받고 싶은 욕망이 똑같은 형상에 모인다. 그래서 고통을 겪는 인간 그리고 아이로 남아있는 어른에게 신이라는 우주적 형상이 생겨난다.몇 번의 대체와 균형을 거쳐 신이 위로의 대행자로 등장한다. 그처럼 아버지 형상은 위로의 기능을 담당한다. ‘아버지 포기’가 위로에 대한 포기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p.378 슈티르너)
윤리는 삶 전체를 통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의무에 대해 반성할 때 먼저 그 점을 숨긴다. 인식 비판을 통해 객관성의 구조를 찾은 후, 거기에서 파생된 형식 범주를 강조하면서 인간 행위의 본래적 차원은 그 아래에 숨긴다. 칸트의 두 비판서가 그렇다. 실제의 행위 구조와는 다르게, 두 비판서 모두 ‘선험’과 ‘경험’을 나눈다. 그렇게 해서 도덕의 원리가 욕망의 힘과 따로 논다. (p.379 이노센티카에 반역하는 칸트, The time is out of joint, 서사의 충족이유율로서 탈시간화)
앞에서 말했듯이 형식주의는 2차 합리화이다. 인식 비판에서 선험과 경험을 구분한 뒤 그것을 그대로 실천의 차원에 적용한 것이다. 그것은 ‘행위’가 인식과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음을 완전히 간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구성에서 형식과 내용의 대립을 피하고 행위 변증법에 접근해야 한다. 행위 변증법의 중심 주제는 활동과 작품의 관계 또는 존재 욕망과 그것의 구현의 관계이다. (p.380 a와 d의 경계선. pas의 역량)
노력은 불특정의 시간, 곧 존재가 계속되는 지속의 시간을 감싸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히테가 단정적 명제라고 부른 가장 근본적인 긍정, 곧 ‘나는 있다’는 것의 밑바탕에 그 노력이 있다. 그 근본 확인이 우리를 이룩하는데,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것을 잃었다. 우리는 그 확인을 다시 찾고 또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실 처음부터 잃을 수 없는 것이고 떨어질 수 없으며 매우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p.380 아님. 헤겔의 부정의 이중규정성부터 들뢰즈의 강도 장에 이르기까지, 존재는 텅 비어 있기에 채워지고 채워지기에 비워지는 중첩 상태이다. 단지, 우연과 경쟁, 흉내 끝의 현기증만이 존재의 방식이며, 모든 것이 긍정되기에 모든것이 부정된다. 그러한 흔들림 속에서 pas의 역량은 일어나고 결국에는 서사를 피워낸다. 제 살결을 찢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코나투스가 동시에 에로스라는 점이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말하기를 사랑은 무엇에 대한 사랑이므로 곧 지니지 못한 것, 빼앗기고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다. ‘존재 결핍 속에서 존재를 확인함’, 노력의 근본구조가 그렇다. (p.381 주체상실의 필연성)
‘나는 있다’ 자체가 하나의 요청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p.381 존재는 물음이다)
“존재의 자리매김이나 의식은 욕망이 최초의 확실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최초 확실성과 욕망이 서로 관계한다는 점에서 최초 확실성의 법은 형태(gestalt)이다. 의무의 질서는 내게 존재 욕망을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존재 욕망의 깊이를 더하는 것, 그것이 윤리다” (p.381 장 나베르 인용/ gestalt는 헤겔에서는 a -> d(a), 즉 a0의 무한대 문제와 동일한 문제로 수렴되지만, 나베르는 다르다. 안주름 상의 나르키소스, 즉 a1의 영지에서 일어나는 반성적 코기토, 양태에 가깝다.)
윤리의 반성/
칸트 - 의무론 ; 국가기구, 관료주의, 프로테스탄티즘 강화
나베르 - 존재 욕망 ; 종교성에 대한 의심 -> 주체 상실과 회복의 반복, 차이와 반복.
윤리의 인간학적 요소 (리쾨르)/
가치는 ‘사건’이고, ‘시작’이 있으며, ‘증언’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확인되는 ‘역사적 신비’이다. 그래서 가치는 케리그마이다. (p.382 언어의 타자성)
존재 욕망 - 표상
문화 구조 - 기능
의무는 욕망의 2차 기능이다. (p.382 미토콘드리아)
어떤 일반 법칙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오직 ‘증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p.383 시차와 차원)
신학이 증언에 따라 기독론에 두는 것을 종교철학은 인간의 존재 욕망에 둔다. (p.383 면역학)
종교의 자리는 분석론이 아니라 ‘변증론’이다. 실천에서 이성의 요청, 다시 말해서 ‘순수 실천이성 대상의 무조건적 전체성’과 관계가 있는 것은 변증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요청의 모순이 일어나는 곳, 바로 거기가 종교의 자리이며 잠시 뒤에 보는바대로 악의 자리도 거기이다. (p.384 테오디세의 도그마적 오류, a0라는 휘브리스, 희극과 비극의 상호성 - 폭력과 파시즘의 필연성, d(a))
전체성 문제는 우리를 어떤 물음으로 몰고 간다. (p.384 합일될 수 없는 합일)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 보고 끝나는 종교는 일종의 교육자이다. ‘마치 무엇 무엇처럼(comme si)’을 가리키는 교육자이다. (p.384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칸트 자신에게도, ‘분석론’의 주제인 의무를 ‘변증론’에서 나오는 희망의 운동 속에 집어넣는 것은 도덕에서 종교로 옮겨가는 일이다. (p.384 <실천이성비판>에서의 오류 a -> d(a)라는 헤겔의 필연성. 푸코; “우리 시대는 논리학을 통해서건 인식론을 통해서건, 마르크스를 통해서건 또는 니체를 통해서건 간에, 모두 헤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헤겔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그와 유리됨으로써 치르게 될 대가를 정확히 평가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비록 공공연하게는 아니더라도 암묵적으로나마 헤겔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알아야 하며, 우리가 헤겔에 대항하여 사고할 때조차 그것이 여전히 헤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를 상대로 한 제소, 그 소송이 실은 그 헤겔이 우리에게 마련한 계략이며, 그 끝에서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사실 "내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하는 울음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 다르고 그래서 희망의 문제가 의무 문제에 덧붙여진다면, 약속의 완성은 인간의 행위와 도덕성을 뚫고 들어온 은총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소외는 약속에서 생기는 소외이다. 칸트가 신비주의와 열광주의(Schwärmerei)라고 해서 싶어한 것은 전체성, 완성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이 바로 종교의 특성이다. (p.385 how의 집중과 그에 따른 why의 아다리 = 은총 / pas, 타자의 욕망선에서 벗어난 고유한 사유와 자유, ‘a1’이 결여된, 사회규율의 문제임. 막스베버가 말한 자본주의-프로테스탄티즘 결합)
악은 설익은 종합, 폭력적 종합, 전체성의 단절이다. 그것이 정말 인간의 악이다. (p.385 칸트에게서 악의 문제로서 ‘변증론’ ; 삼류문학과 일류문학의 공명관계 - 에피스테메의 Ne(파시즘)적인 속성)
‘요청된’ 신은 아직 진짜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원형(archetype)’ 속에서 ‘선한 원리’의 ‘표상’과 함께 생겨난다. (p.386 앎의 영역에 두는 기독론, 수직적 형상 - 역학적 압력(Ne))
종교 문제가 발생하는 곳은 - 이 점에서 헤겔도 칸트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 - 전체성 욕망의 선험적 도식 차원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실천이성’의 변증론과 관련된 ‘표상’의 문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원형 인간 속에서 선한 원리의 도식을 만드는 문제이다. (p.386 도그마 복제 - 반발력 작용, 파시즘 - 암세포)
스피노자처럼 칸트는, 만인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고난받는 의인이라는 관념을 사람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물론 신학자들은 사건을 관념으로 보는 데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형식주의에는 맞다. (p.386 스피노자 = 미토콘드리아/ 관념론자로서의 칸트 ; 순수이성에 의한 인간 의지)
종교철학은 선의 원리가 만들어내는 그 원형이 인간 의지에 끼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p.386 완성의 상징)
존재 욕망의 ‘완성’은 결국 신화적이고 시와 같은 상상력의 문제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분이다. (p.387 ‘성인’에 대한 욕구 ; 거울(나르시시즘)의 외재화로서의 권력 -> ‘육신이 되신 말씀’ / pas를 향한 욕망, 밖주름(Le Dépli))
그런 도식들의 생산적 상상력과 우리 욕망의 비약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하여 형식주의라는 추상적인 물음의 자리에 욕망의 탄생이라는 구체적인 물음이 들어선다. 믿음은 욕망의 탄생 또는 의지의 시학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새사람과 거듭남의 상징들 속에서 이해하게 한다. 우리는 상징의 재건력에 이끌려 그 상징들을 다시 붙잡고 도덕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p. cosmodicy -> innocentica)
죄는 계명 위반이 아니며 법과 탐욕이 짝을 이루어 생기는 것이다. 죄는 케케묵은 법의 체제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법의 체제 밑에서 계명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다. 계명 위반은 그다음 문제이다. 그러므로 죄의 반대는 도덕이 아니라 믿음이다. (p.388 아우라-아가페의 필연성)
악의 기원에 대한 반성에서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악과 허물을 케리그마로부터 재해석하려는 노력에 있다. 내가 악을 케리그마 쪽에서 해석하려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p.388 상징의 사유 연장 - 이념의 발산적 집약으로서의 상징 - 차원 -> 시차의 발생과 악의 상징)
리쾨르 악의 재해석 기본 조건 3가지
1. 정죄를 비신비화한 힘이 계속 압력 (d1)
2. 정죄/ 위로의 비신비화의 동시성 (d2)
3. 하느님(cosmodicy)은 사랑(a0~a2)이라는 복음에서 출발
(pas가 없어유….. 개별로)
표상 후성설은 가상에서 돌이켜 상징으로 가고, 최초 장면의 자취를 그리는 환상에서 돌이켜 기원의 시상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p.389 a0 대 a1)
환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화 창조에서 이룩된 것을 나는 상징 기능이라고 부르겠다. 그렇게 해서 최초 장면의 환상은 기원을 탐구하고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도구로 바뀐다. 그와 같이 무엇을 ‘탐지하는’ 표상 덕분에 사람은 사람이 됨을 ‘말한다’ (p.389 a1으로 부터의 꿈의 해석학 - 존재의 일의성, 기관 없는 신체)
상징에는 이전의 흔적을 담고 있는 기능이 있지만, 그러한 기능을 넘어 기원의 상상력이 발동한다. 그 상상력은 무엇의 도래, 곧 존재로 나옴을 말한다는 점에서 ‘실존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연대기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역사’라고는 할 수 없다. (p.390 서사의 탯줄로서의 a1)
끊임없이 해석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충만한 기억이 아니라, 속이 빈 채 입을 벌리고 있는 기억이다. 인류학이나 비교신화학이나 성서 주석에서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신화 하나하나가 옛이야기들을 재해석한 것이다. 해석의 해석이다. 결국 여러 시대와 여러 단계에 걸친 리비도의 환상들에 대해 해석의 해석이 일어나는 것이다.
(p.390 결핍과 흠에 의한 리비도 카덱시스, a1 -> d2의 역으로서 d1 -> a0/ 시차와 차원의 변화로 인해 살아 숨쉬는 아우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새겨진 내용’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 새로운 지향성을 이루는 해석운동 그 자체이다. (p.390 삼중의 미메시스)
환상에서 상징으로 가는 운동은 문화 문서, 곧 본문을 매개로 해야 하는데, 딜타이의 말대로 본문은 곧 바로 해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p.390 d2의 항상성)
의식의 예언자는 의식의 고고학 바깥에 있지 않다. 상징은, 극복되었지만 폐지되지 않은 환상이다. 반성하는 해석을 통해 내 것으로 삼는 상징의 의미는 언제나 원초 신화의 흔적 위에 있다. (p.391 상징은 그자체로 ‘헤르메네이아’ 곧 해석이며 그 해석의 도구가 말이기에 표상 후성설은 살아 숨쉰다 - 의식의 선험성, 이념에서의 질, 질의 연장으로서의 양과 상징)
불의에 대한 의식이 복수에 대한 두려움 또는 벌 받는 데 대한 두려움과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의미를 창조한다. (p.392 상대성에서의 윤리 발생 - 주름운동)
성(性)적인 죄를 재해석해야 한다. 남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을 진행해가야 할 것이다. 삶을 저주하는 흔적을 간직한 것들은 그 해석에서 제거해야 한다. (p.392 안티 오이디푸스로서의 이노센티카, d2의 너머, 쾌락원칙을 넘어서)
정죄하는 의식은 항변하지만 그 항변 뒤에는 원한의 권세가 감추어져 있다. 그 원한은 교묘한 미움이면서 동시에 음흉한 쾌락주의이다. (p.392 innocent + etica, 무죄성의 윤리학)
믿음은 우상파괴를 일으킨다. 믿음은 정죄하는 의식을 비판하면서 정죄 비판을 새롭게 생각한다. (p.393 “변수란 신앙의 창조와 파괴이다. 디케(테오디세)를 불(코스모디세)사르는 작용으로서 합불합(合不合)은 실재한다.”)
사실 욥은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얻지 못했다. 다만 그는 믿음으로 도덕적 세계관을 빠져 나왔다. 그에게는 위대한 전체만 보일 뿐이며, 유한한 욕망의 관점은 그 위대한 전체에서 곧바로 의미를 얻는다. 그리하여 새로운 길이 열렸다. 나르시시즘이 아닌 화해의 길이다. 나는 내 관점을 포기하고 전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p.39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유를 두지 않는데에 이유를 둔다)
사랑의 분노란 무엇인가? 바울이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다. 사랑의 슬픔은 위대한 아버지의 분노보다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것은 벌에 대한 두려움 ㅡ 프로이트에 따르면 거세 공포 — 이 아니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데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 곧 신에 대한 두려움의 마지막 단계가 여기 있다. 동시에 니체의 말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도덕 신은 논박되었다." (p.393 애착 형성의 과정으로서의 a0와 a1 - 이중부정의 양태로서의 아가페)
정죄의 승화는 키르케고르 쪽으로, 위로의 승화는 스피노자 쪽으로 윤리를 밀어낸다. (p.394 cosmodicy에 동화되는 스토아적 통찰 - 좀 별로…. 정죄의 승화를 절벽으로 밀어 던지고 위로의 승화는 스피노자 처럼 범신로의 체계로서 세상에 흩뿌려 인타라망을 비춰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지적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하나님)을 사랑한 무한한 사랑(quo Deus seipsum amat)의 일부분이다.” (p.394 스피노자 인용, 자비의 필연성으로서 아가페의 상대적 반항, 관음보살의 나타라자)
윤리를 밀어내는 두가지 양태. 곧 정죄의 양태와 위로의 양태가 어떻게 같은 것인가?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지적 사랑의 과제이다.여기서 나는이렇게 말하겠다. 이해는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끊임없이 그 상징을 바로잡아가는 믿음으로 안다. 앎이다. 모순된 것과는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 -사랑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지만 -이다. 그 이해를 움직이는 것은 욕망과 두려움을 쉴새 없이 정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p.394 d2에서 a2로 추동시키는 토폴로지, ‘너’의 종교성)
형벌 개념만큼 합리적인 것은 없다. 아니, 그만큼 합리성을 내세우는 것도 없다. (p.395 도덕으로서의 파시즘)
형벌 신화의 해석 -> 리트레 ; “형벌이란 비난받을 만한 일 때문에 당하게 하는 것”
1. 고통의 내재 ; 도덕 악에 대한 물리적 악
2. 한 의지에 영향을 주는 다른 의지의 명령 (형벌을 내린 후에 형벌을 당한다 - 벌 내림)
3. 균형점 (‘때문에’는 ‘값으로’ 또는 ‘대가로’를 가리킨다. 벌음 범죄의 대가이다)
4. 등가성 ; 형벌은 저지른 잘못을 지우고 없앤다.
범죄는 악을 행하는 것이고 형벌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서로 자리가 다르다. 그런데 그 둘이 범죄자의 의지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형벌이 범죄를 보상하게 된다. (p.396 GM, ‘형벌은 축제다’)
범죄로 저질러 놓은 것을 벌로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다. (p.397 저지른/당하는 과 정죄하는/정죄된 의식의 이중성)
신성한 질서 속에 생긴 흠을 없애고 또한 그 흠의 결과를 없애는 것이 형벌이고, 그때 그 형벌을 속죄라고 부른다. 그렇게 보면 신성한 세계에서 속죄는 매우 ‘합리적인’ 것이다. (p.397 통치 기구, 신성한 세계에서는 형벌이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형벌 신화는 정말 이상한 신화이다. 신화가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건립 설화 한가운데 박혀있는 법을 보여준다. 그 법은 모든 역사 시간을 태초의 시간에 묶어둔다. 그런데 형벌 신화의 이성 역시 이상한 이성이다. 생각의 논리가 아닌 힘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는 법으로 우리의 오성을 누르고 있다. 형벌을 거치면서 정화의 힘이 흠의 힘을 없애버린다. (p.398 신화 - 권력 결합의 직접성)
형벌 문제에서 신화와 합리성이 공동 전선을 이룬다. (p.398 법의 현재성 - 권력의 직접성)
형벌의 논리에서 신화와 이성이 짝을 이루고, 그것이 문화 속에서 잘 표현된 것이 바로 종교와 법의 심판의 친밀함이다. (p.398 아우라의 정치적 활용 - 제1혁명기 까지 유효, 현재는 포스트렉시아의 세계)
신성한 무엇이 끊임없이 법 심판을 성스럽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의 세 번째 난점이다. 다른 편에서 보자면 법 심판이 신성한 종교 차원을 법 차원으로 만든다. 이것이 네 번째 난점이다. (p.398 순환논증, 폐쇄적 훈육 - 푸코의 판옵티콘)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에 따른 형벌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p.399 치료의 관점에서, 헤겔의 <법철학>)
“이미 악이 있다는 이유로 거기에 악을 더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p.400 헤겔 인용, 카뮈 - 절도의 반항 - 폭력의 연쇄 방지 - 바쿠닌 등의 테러리즘)
범죄에 맞춰 형벌을 줌으로써 가장 합리적이기를 바라지만, 그런 형벌이 범죄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상당히 비합리적이다. (p.400 형벌의 무근거성, 카인의 후예)
원죄는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류전체가 거기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현대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 전체가 ‘타락한 집단(massa perdita)’이라는 것, 법에 따라 처벌 받을 범죄라는 것, 그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p.401 무단횡단 - 도덕의 경제학/ 만족설 - 그리스도로 인한 형벌 면죄 - 은 사후적, 형벌싱학의 선험적 개입)
바울 ; 그가 말한 ‘의롭게 여김’은 사람이 ‘고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은혜는 그런 재판 상황에서 무죄 석방하는 것과 같다. 의롭게 여긴다는 것은 내려진 벌을 면제 받는 것이다. 의롭게 여김 받은 사람은 그 믿음이 ‘의로 여겨진’ 것이다. (p.401) -> 마치 형벌법을 떠나서는 은혜와 용서와 자비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 법을 물리치는 것 같으면서 다시 끌어들인다. 무죄 석방이란 여전히 형벌법과 연관된 문제 아닌가? (p.402 ‘신성한 사건’으로서 사회 윤리 - 도그마적 실행의 완성으로서 형법 논리 ; 체제 강화의 역설/ pas, 담론장의 형성과 에피스테메 철폐로서 형법의 의의 - 신화와 이야기의 즐거움)
“인격이 되라. 그리고 타자도 인격으로 존중하라” (p.403 - 헤겔 <법철학> $36 인용 ; 면역학 이전의 ‘합일될 수 없는 합일’)
1. 부정의 이중규정성 -> ‘그리하여 나는 바깥에 존재한다’
2. 면역학의 교환법칙 ; ‘교환 법칙은 대개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인격들 사이에 계약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p.404)
-> 권리의 침해 = ‘바깥 사물 속에 나의 자유가 현존하는 것을 막는 강압’ (p.404 <법철학> $94 인용)
의지는 바깥에서 구현되어야만 이념이 되고 현실적으로 자유롭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불법의 내부 모순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p.404 피어나라)
권리로서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그 침해는 실정적이고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 부정을 안고 있다. 그러한 부정성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침해에 대한 부정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권리 침해를 지양함으로써 권리가 스스로 자신을 이어간다는 필연성, 바로 그것이 법(권리)의 현실성이다. (p.404 <법철학> $97 인용; 분기점 혹은 pas의 현장으로서 형법의 역학 - 결국에 이야기니까, 아름다워야 하니까)
형벌 개념은 범죄의 부정성 자체에서 나온다. (p.404 무죄성의 윤리 - 무주의 상태로서 cosmodicy
“그 자체로 부정을 안고 있는 의지인 범죄가 반드시 자신을 부정하도록 하는 관계, 바로 그것이다.” - pas의 의의로서 형법 - 그러기에는…..너무 관료주의, 절차주의적이다)
범죄를 낳은 범죄자의 의지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제거해야 한다. (p.405)
“범죄자의 행위 속에 이미 형벌이 범죄자 자신의 권리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바로 이 점에서는 범죄자도 이성적인 존재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이다.” (p.405 <법철학> $100 인용/ 1. 어쩌면 파르헤지아로서 개인의 선택이자 결단(테러리즘, 숭고한 자살)/ 2. 이 자체로도 이미 폭력 - ‘나는 당신들과 계약하지 않았소’)
<법철학>에서의 헤겔의 형벌 논리
1. 의지철학 - 자유의 실현 (무죄성의 윤리 - 테오디세의 알량함)
2. 추상법 차원 - 무지의 베일 차원 (인타라망, 모나드와 클리나멘의 형식화)
3. 사물 - 소유물 (이야기의 구현으로서의 사건 ; 역학적, 면역학적 태제로서의 주관)
4. 계약법 (합의 되었다) -> 나는 반댈세…. 루소의 사회 계약설과 일반의지
형벌은 도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형벌에서 나타나는 주관 의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복수심이기 때문이다. 형벌을 그런 주관 의지의 작용으로 보는 순간 그 의지가 특수하고 우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p.405 법이라는 휘브리스 아래 꿈틀대는 독단적인 데카당스)
“복수는 이렇듯 특수 의지의 적극 행위라는 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침해가 된다. 결국 복수는 이러한 모순을 빚는 가운데 무한으로 진전되어 대를 이어가면서 무한히 이어져나간다.” (p.406 <법철학> $102 인용, ‘특수하고 주관적인 의지가 동시에 보편적인 것 그 자체를 의욕’해야 한다 ; 가이스트에 일관한, 형식법학의 전형/ ‘카인의 후예’라는 위상학에서 현상학적으로는 맞말. 카뮈도 ‘정의’ 선상에서는 일정부분 동의. 하지만, pas의 연장선상에서 부처의 자비와 염화시중은, 형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되려 함무라비 법전이 깔끔할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연성 문제를 놓고 자신을 돌이켜 무한이 즉자에 그치지 않고 대자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주관 도덕의 과제이다. (p.406 형법의 알량함, 인타라망)
스스로 충족된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주관의 특수성의 권리나 이와 마찬가지 뜻에서의 주관적 자유의 법이야말로, 고대와 근대를 구별짓는 전환점이며 또 중심점이다. (...) 추상적인 반성은 이 계기를 보편적인 것과의 구별과 대립이라는 모습으로 고정시킨다. 그리하여 추상적 반성은, 도덕은 오직 자기만족에 대한 적대적 투쟁으로서만 영속하는 것이라는 도덕관을 낳는다. (p.406 <법철학> $124 인용, 무한대-발산의 중첩 상태)
충돌이 생길 때 ‘양심’은 동일성 논리에 따라 범죄에서 징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부 분열로 간다. (p.407 추상법 밖에서의 정죄하는 의식과 정죄된 의식 사이의 충돌, 상대적 반항의 필요성 - 그러나 보편자의 영지를 남겨 두어 결국에 공통자로 다시 회귀하는 무한대의 문제)
용서를 통해 정죄하는 의식은 자기 판단의 특수성과 일방성을 포기한다. (p.407, <정신현상학> p.806 인용/ 악한 것이 도리어 선한 것임을 시인함 - 노예도덕에 대한 헤겔의 인지 ; 용서보다는 화해를 통한 상호인정)
범죄와 형벌의 논리는 법의 문제일 뿐 도덕문제가 아니다. 범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악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무한한 주관성의 모순에 빠져들게 된다. (p.408 그렇게 하자니, 이성의 왕국, 내일의 가면을 쓴 제국주의가 범람해, 살육기계를 작동시키는 것 밖에 더 되지 아니한다. 그런고로 ‘서사 주체’에 기반한 생디칼리즘,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를 이륙해야 한다)
문제의 극복은, 악의 책임을 묻는 데 있지 않고 주관적인 관점을 포기하는 데 있다. (p.409 스읍… 그럼 대타자가…)
악의 책임을 물어 벌 주는 것은 정죄하는 의식과 정죄된 의식 사이에 거리를 벌려놓는다. (p.409 음…. ne의 날카로움, 지장의 매서움 -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형벌의 논리는 신화 없는 논리이다. 의지의 논리, 곧 자유의 역사적 규정의 논리로 가기 때문이다. (p.410 ㄴㄴ 치유의 과정으로서 사법 해체수순상의 입법에서 형벌의 논리 - d1, ne의 단절 - 는 필수불가결 하다. ex. 윤석열 ; 이율배반의 필연성을 가슴에 안고 결국에 정죄하는, 정죄된 도 아닌 무죄성의 윤리, 이노센티카로 - 카뮈 미만이다)
신화 해체에 그치지 말고 재해석으로 가야한다 (p.411 대타자 비평은 되려 대타자를 일으키고 잠재시킨다는 마크 피셔의 통찰)
내면세계로의 과정(입법) 상, 형벌 논리의 두가지 공리 (p.410)
1. 자유는 사물에 외화
2. 계약을 통해 의지들이 밖에서 연결
—-- 잠시 중단 —--
이유/ 이성신학으로 가는듯한 똥꾸릉내가 존나 남. 음..... 아니야. 이 시간에 다른 쪽을 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