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와 커피 전문점이 공존하고 있다 (p.12)
행위는 소용없다. 무의미한 희망만이 의미를 만든다. 무력한 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곳인 미신과 종교가 급증한다. (p.13)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약한 메시아주의적’ 희망이 그 어떤 새로운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침울한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p.13)
새로운 것은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에 응답하면서 스스로를 정의한다. 동시에 확립된 것은 새로운 것에 답하며 자신을 재형성해야 한다. 엘리엇(T.S.엘리엇)의 주장은 미래를 고갈시키게 되면 우리에게는 과거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통이 더 이상 논쟁되거나 변경되지 않을 때 그 전통은 아무 쓸모도 없어진다. 그저 보존되어 있기만 한 문화는 결코 문화가 아니다. (p.14 囚)
어떤 문화적 대상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그 힘을 유지할 수 없다. (p.15)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힘은 부분적으로 자본주의가 이전의 모든 역사를 포섭하고 소비하는 그 방식에서 나온다. (p.15 재인의 공준, ‘등가체계’ / 어미의 사망보험금을 이도저도 못하는 소설속 주인공 - 지급준비율)
옛 문화의 실천이나 의례가 한낱 미학적 대상으로 전환됨에 따라 그것들에 대한 믿음은 객관적으로 아이러니해지고 인위적인 것으로 변형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특수한 유형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리얼리즘 자체에 가까운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관찰했던 것처럼 말이다. (p.15 아우라의 전복과 파시즘의 위상학)
부르주아지는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문서로 보장된 혹은 정당하게 얻어진 수많은 자유를 단 하나의 파렴치 상업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p.16 <공산당 선언> 중에 발췌)
자본주의는 정교한 의례나 상징수준에서 믿음이 무너진 뒤 남겨진 무엇이다. 이제는 그 폐허와 유물 사이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소비자 - 구경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p.16 늪)
가령 우리가 완벽히 좋은 상황에서 살고 있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완전히 나쁜 상황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피로 얼룩진 독재보다는 낫다고, 자본주의는 부당하지만 스탈린주의 같은 범죄는 아니라고, 우리는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에이즈로 죽도록 방치하지만 밀로셰비치처럼 인종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선포하지는 않는다고, 우리는 비행기로 이라크인을 살해하지만 그들이 르완다에서 하듯 마체테로 사람 목을 베지는 않는다고 말이죠. (p.17~18 알랭바디우 On Evil ; An interview with Alan Badiou)
여기서 ‘리얼리즘’은 긍정적 상태나 희망은 위험한 환영일 뿐이라고 믿는 우울증자의 암울한 관점과 유사하다. (p.18)
자본주의의 경계들은 명령에 따라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즉흥적으로 정의(되고 재정의)된다. (p.18 니체, 우월한 인간과 최후의 인간 - 슈티르너, 슘페터, 슈미트)
무심한 방관주의가 참여와 개입을 대체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이 처한 상태다. (p.20 앎의 과잉, 세계주의적 감지)
80년대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위한 싸움이 벌어지면서 그것이 확립된 시기였으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간명한 스로건이라 할 수 있을 ‘대안은 없다’라는 마가릿 대처의 독트린이 야만스러운 자기 - 충족적 예언이 된 시기였다. (p.22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이유1)
모더니즘은 이제 주기적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그러나 결코 삶의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얼어붙은 미학적 스타일로서만 되돌아올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p.22 뺑뺑이)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식민화해 왔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 이상 논평할 가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까운 과거가 정치적 잠재성들로 가득한 타락 이전 상태였다고 상상하는 태도는 위험하며 오해를 초래할 소지가 있다. (p.23)
대부분의 힙합(68 파생 ‘록’의 후예)에서 청년문화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희망은 야만적이고 환원주의적인 판본의 ‘현실 reality’을 냉정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p.25)
따지고 보면 힙합이 둘째 의미의 리얼로, 즉 후기자본주의의 경제적 불안정성이라는 현실로 손쉽게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첫째 의미의 리얼, 즉 ‘비타협적인 것’을 보여 준 힙합의 실천 때문이다 (p.26 주노변증법의 역설, 피드벡)
힙합; 순진한 비타협성 -> 신자유주의 ; 홉스적인 만인투쟁 (feat. 사이먼 레이놀즈)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 ; 고갈(대안의 부재)/ 2. 모더니즘의 축복에 대한 당연시(구토의 부재, 편승)/ 3. 식민화(앵무새 혹은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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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팔러, ‘상호 수동성’ ; 반자본주의의 외재화를 통한 결여와 그에 대한 망각 (조숙아적 운명고리, 일례로 <월E>)
선전(propaganda)과 달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옹호하지 않으며, 자본의 작동이 어떤 주관적인 믿음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p.30)
지젝, ‘냉소주의 이데올로기’ (실상을 은폐하고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 일례로 화폐의 아이러니컬한 물신화 - 교환수단 이상의 의미)
냉소적인 거리두기는 단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지니고 있는 구조화하는 힘에 눈을 감아버리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리 아이러니한 거리를 유지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p.31 지젝 인용)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p.32)
즉 이미 머릿속에서 화폐와 아이러니한 거리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행동에서 화폐를 물신화할 수 있는 것이다. (p.32)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일관된 정치경제 모델을 정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운동은 그 실제 목적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최악의 과도함을 경감하는 데 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 정치적 조직화보다는 주로 항의를 무대화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이 운동은 스스로도 실제로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련의 히스테리적 요구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런 반자본주의적 항의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일종의 카니발적인 배경 잡음을 형성했다. (p.32)
진정한 정치적 행위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욕망의 층위에서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환영적 대타자(Other)들에 대한 무지와 악의 적나라함 속에서 부인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세계의 억압적 네트워크와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과도하게 추상적인 비인격적 구조며 동시에 우리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p.34 a0 to a1을 위해 지각해야하는 d1. 囚에서 因으로의 한획으로서 a1)
그들이(엘리트층) 우리에게 제공하는 초라한 서비스는 우리의 리비도를 세탁하는 것, 우리의 부인된 욕망들이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 그것들을 우리 앞에 친절하게 재현(re-present)하는 것이다. (p.34)
보노의 브랜드 프로덕트레드Product Red는 자선 활동마저 생략하고 싶어 했다. 보노는 "자선 활동은 손을 맞잡는 히피 음악과 비슷하다. 프로덕트레드는 핑크록이나 힙합에 한층 가까우며, 이는 고된 상업 활동처럼 느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는 것은 이 사업의 핵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프로덕트레드가 보여준 '핑크록'이나'힙합'적인 특징이란 자본주의가 도시의 유일한 게임임을 '현실주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프로덕트 레드의 목표는 그저 이 특수한 거래로 발생한 수익금 일부가 훌륭한 명분에 쓰인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환상은 서구의 소비주의가 지구 전체의 체계적 불평등에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기는커녕 그 자체를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담겨 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는 공정 제품들을 사는 것이 전부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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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p.36)
자본주의가 고통을 안기는 방식을 강조하는 도덕적 비판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할 뿐이다. 빈곤, 기아, 전쟁 등이 현실의 불가피한 일부로 제시되는 한 이런 고통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쉽게 순진한 유토피아주의로 치부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비일관적이고 방어될 수 없음을 드러낼 때만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p.37)
‘현실주의적(realistic)’이라 간주되는 것, 사회적 장의 어떤 지점에서나 가능해 보이는 것은 당연히 일련의 정치적 규정에 의해 정의된다.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자연화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성공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니라 가치로 생각되는 동안에는 결코 자연화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 윤리적 의미에서의 가치라는 범주를 제거하고자 했다. (p.37)
브레히트부터 푸코와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급진 이론가가 주장해 왔듯이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해야 하며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제시되는 것이 그저 우연적일 뿐임을 폭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을 성취 가능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p.37 - 만법가지대탈, 휘브리스와 데카당스의 나타라자)
주판치치; 현실원칙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매개된다. (p.39)
라캉에게 실재는 모든 ‘현실’이 반드시 억압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은 자로 이러한 억압을 통해 구성된다. 실재는 재현할 수 없는 X, 겉으로 드러난 현실의 장 내에 있는 균열과 비일관성 속에서만 엿볼 수 있는 어떤 외상적 공백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한 가지 전략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현실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p.39 반발력 공식 끝에 테오디세의 코스모디세 억압)
자본주의와 생태 재앙의 관계는 우연하거나 부수적인 관계가 아니다. 자본의 “끊임없이 시장을 확장해야 할 필요”, 자본의 “성장이라는 물신”은 자본주의가 바로 그 본성상 지속 가능성에 관한 어떤 통념과도 대립한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p.40 지속가능성이라는 개소리)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주는 2개의 상이한 아포리아 ;
1. 정신건강(내재적 고장, 날씨같은 자연적 사실인 양 - 건강보험 -> 스트레스의 개인화)
2. 관료주의(주도 목표에 종속, 시장 스탈린주의)
-> 연장교육 대학에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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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적 무기력(reflexive importence, 어떤 자기충족적 예언) ;
이들은 사태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 (p.44 무기력을 학습할 지능이 있는데, 멍청할리가)
우울증은 이들의 고질병이다. 우울증은 대개 국민건강보험으로 처리되는 질환이며 이로 인해 고통받는 연령대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p.45)
정신적 문제들이 개인화됨으로써, 즉 개인 신경계의 화학적 불균형 그리고/또는 가족 배경에 의해 야기되는 것인 양 취급됨으로써 사회 체계의 인과관계에 대한 어떤 물음도 배제된다. (p.45 d1과 다른, 독단과 단독의 차이)
우울증적 쾌락(depressive hedonia) -> 푸코의 훈육사회(기관, 노동자, 수감자)과 다른 통제사회(분산형 조직에 착근 embeded -> 무한히 지연되어 내적인 관리로. 하버마스의 나약함, 채무자, 중독자) ;
일반적으로 우울증을 특정짓는 것은 무쾌락 상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상태는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생들은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느끼지만 오직 쾌락원칙 너머에서만 이 누락된 불가사의한 향락에 접근할 수 있음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p.45 GM 마지막; Und, um es noch zum Schluss zu sagen, was ich Anfangs sagte: lieber will noch der Mensch das Nichts wollen, als nicht wollen)
권력이 이처럼 ‘무한히 지연되는’ 양식을 취함에 따라 외적인 감시는 내적인 관리(policing)로 대체된다. 통제는 우리가 그것과 공모하는 한에서만 작동한다. 이로부터 버로스의 ‘통제 중독자’라는 인물상, 즉 통제하는 일에 푹 빠져 있지만 또한 불가피하게 통제에 내맡겨지고 지배당하는 자가 나온다. (p.47 라캉주체, 포스트 훈육 체제)
대학의 재정 지원 체계는 대학이 원할 때조차 말 그대로 학생들을 거부할 형편이 안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재원은 대학들이 학업성취(시험 결과), 학생 수, 출석이라는 목표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충족시키는지를 기준으로 할당된다. 시장의 명령과 관료주의적으로 정의된 ‘목표’의 이같은 결합은 현재 공공서비스를 규제하고 있는 ‘시장 스탈린주의적’ 실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실질적인 훈육체계로부터의 벗어남이 학생들의 자발성 증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p.47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케인즈주의-파시즘의 결합)
교사들이 가장 빈번하게 듣는 불평은 ‘따분하다’는 것이다. 쟁점은 글의 내용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따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p.48 새로운 육체(new flesh) -> 데이터와 리비도에 반응하는 인터페이스적 신체 (new pasism) ; ‘너무 자극받아 집중할 수 없는’)
어떤 학생들은 햄버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니체를 원한다. 이들은 그 소화하기 힘듦, 그 어려움이 곧 ‘니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며 소비 체계의 논리는 이러한 오해를 부추긴다. (p.49 무관심과 진입장벽)
팝은 이제 공적 공간에 충격을 주는 무언가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오이디포드(oedipod)’ 행복감에 안주하는 소비자의 경험, 사회적인 것을 피해 집 안에 틀어박히는 경험으로 다가온다. 엔터테인먼트 매트릭스에 걸려들면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상호 수동성, 전념하거나 집중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학생들은 현재의 집중력 부족을 미래의 실패와 관련짖지 못하고 시간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종합하지 못하는데 이는 단순한 의욕 상실 이상의 징후를 의미한다. (p.49 헤테로토피아 - 아르시시즘 연결을 통한 훈육구조/ 파편화와 합성의 과정 - 무의 욕망)
“의미화 사슬의 붕괴와 더불어 라캉적 정신분열증은 순수한 물질적 기표들에 대한 경험, 달리 말하면 순수하고 서로 무관한 일련의 현재들에 대한 경험으로 환원된다.” (p.50 프레드릭 제임슨) -> 다시 말해 이들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디지털의 극소 조각들로 이미 잘려 있었다. (p.51 쇼츠 속의 파시즘)
“의미화 사슬의 붕괴와 더불어 라캉적 정신분열증은 순수한 물질적 기표들에 대한 경험, 달리 말하면 순수하고 서로 무관한 일련의 현재들에 대한 경험으로 환원된다.” 제임슨은 1980년대 말, 즉 내가 가르치는 학생 대부분이 태어난 시기에 이 글을 썼다. 우리가 지금 교실에서 대면하는 학생들은 저 무역사적이고 반기억적인 블립(blip culture)에서 태어난 세대다. 다시 말해 이들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디지털의 극소 조각들로 이미 잘려 있다. (p.50)
훈육; 노동자 - 수감자
통제; 채무자 - 중독자
사이버 공간의 자본은 사용자를 중독시키면서 작동한다. (p.51 a과정, b과정, c과정)
포스트렉시아(post-lexia, 직관우월주의) = a1 상에서는 직지인심, 탈언어. 그러나 a0 상(현시대의 흐름, 일례로 인스타 댓글창)에서는 “글쓰기는 결코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심오하게 반문자적이다. 전자 언어는 목소리나 글쓰기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데이터 처리 과정은 그것 둘 없이 행해진다.” (p.52 파시즘)
교사들은 조력자-엔터테이너 역할과 훈육자-권위주의자 역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교사들은 학생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 학생들은 우리가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주는 권위 있는 인물로 호명되는 교사들은 ‘따분함’의 문제를 가중시킨다. 권위의 자리에서 오는 어떤 것도 선험적으로 따분하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확히 훈육 구조들이 제도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바로 이순간에 그 어느때 보다 더 교육자에게 훈육자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맞벌이하도록 내모는 자본주의의 압력에 가족이 굴복하게 됨에 따라 점점 더 교사들은 대리 부모 역할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행동 규약들을 심어 주고 최소한도로만 사회화되어 있는 10대들에게 사목적이고 정서적인 지지를 제공할 의무를 짊어진다. (p.52 랑시에르, 무지의 스승)
당신의 착취에 돈을 지불하라, 즉 빚을 내 대학에 가라, 그러면 열여섯에 학교를 떠났더라도 쉽게 얻었을 그 맥잡 McJob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p.53 개돼지)
“시간성의 붕괴는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시간을 실천의 공간으로 만들었던 모든 활동과 지향성에서 현재의 시간을 갑작스레 해방시켰다” (p.53 프레드릭 제임슨 인용, 파편화 가중의 현대 사회)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 (liberal communists)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동시에 노동 관행이 ‘스마트해지기(being smart)’라는 개념에 발맞추어 (포스트)모던화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p.55, 조지 소로스와 빌게이츠 등) -> “고정된 위계에 저항하는 자율적인 상호작용 및 자가 생산 등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p.55 지젝 인용) ->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극복할 수는 없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안정 지향자들과 자선으로 자본주의의 비도덕적 과잉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함께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현재의 정치적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p.56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내면화를 통한 통제, 이재용 빨아주기)
‘유연성’, ‘노마디즘’, ‘자발성’ 등은 포스트포드주의적 통제 사회에 볼 수 있는 경영의 주된 특징이다. (p.56 자발적 노예)
자본은 어떻게 해야 노동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에 반해 포스트포드주의 상황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어떤 전술이 운용될 수 있을지, 나아가 그러한 상황을 다루기 위해 어떤 ‘새로운’ 언어가 창안될 수 있을지는 아직 충분히 사고되지 못했다. (p.56 한병철의 문제 - 해결책 없음)
포드주의(안정지향자, 엄격함, 제1혁명~2혁명기 중반)에서 포스트포드주의(자유주의적 공산주의-신자유주의로서 레닌주의, 유연함, 68혁명~현재)
동기부여/ 동기상실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따라서 통제 프로그램과의 탈동일시가 낙담에 빠진 무관심과는 다른 무언가로 등록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한 가지 가능한 전략은 정치의 영역을 옮겨 놓는 것이다. (p.59 휘브리스와 데카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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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황을 요약해 주는 슬로건은 ‘장기적인 것은 없다’ no long term 이다. 예전에는 노동자들이 일체의 기술을 습득하고 엄격하게 조직화된 위계질서하에서 진급을 기대했다면 이제 이들은 끊임없이 이 회사 저 회사, 이 역할 저 역할을 전전하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배우도록 요구받고 있다. 노동 구조가 탈중심화되고 수평적 네트워크가 피라미드식 위계질서를 대체하면서 ‘유연성’이 중요해졌다. (p.62 직업 선택의 자유를 명목으로한 책임의 전가 - 자본주의에서 나고자란 노동자들 + 문사철 교육에 대한 장벽)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상황은 정확히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예상했던 그 방식으로 모순에 처해 있다. 즉 자본주의는 가족을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돌보는 본질적인 수단으로, 무정부적인 사회경제 상황이 야기한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책으로) 요구하고 있다. 자신이 (부모가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만들고, 부부를 서로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그들에게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부과하면서) 가족을 침식해 가는 그 순간에 말이다. (p.63 보모국가 Nanny state의 붕괴)
포드주의적 생산 라인의 ‘엄격함’은 오늘날 모든 노동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단어인 새로운 ‘유연성’에 자리를 내줬다. 이 유연성을 정의한 것은 자본과 노동의 탈규제였고, 그 결과 (갈수록 더 많은 노동자가 한시적으로만 고용되는) 노동 인구의 임시직화와 아웃소싱화가 진행되었다. (p.64 준비되어 있지않던 자유 ; 방임적 질서의 탄생)
일과 삶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은 우리가 꿈꿀 때 우리를 쫓는다.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이지 않으며, 무질서해지고 점 형태로 분할되었다. 생산과 분배가 재구조화됨에 따라 신경계도 재구조화되고 있다. 적기 생산의 한 요소가 되어 효율적으로 기능하려면 우리는 예견할 수 없는 사건에 대응하는 능력을 발달시켜야 하고 전면적인 불안정성 혹은 기괴한 신조어인 '프리캐러티' precarity 상황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취업 상태와 실업 상태가 번갈아 이어진다. 대체로 우리는 일련의 단기 일자리에 고용되어 있어 미래를 계획할수 없는 처지다. (p.65 저당 잡혀 시작되는 삶)
결과적으로 포스트포드주의하의 노동자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예의 집’을 떠난 후의 유대인과 비슷해졌다고 마라치는 주장한다. 속박 상태에서 해방되어 그곳으로 되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지만 또한 사막에 버려지고 좌초해 있기에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p.66 역사의 부재와 담론의 축소 - 파리 코뮌)
자본주의는 다른 어떤 사회 체계에서도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사람들의 기분에 의존하고 그것을 재생산한다. 망상과 자기 확신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p.67 나르시시즘 공장)
“웰빙에 가장 유해한 이기적 자본주의 독소는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가 성취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부유한 자만이 승자고 열심히 일할 의지만 있으면 가족, 인종, 사회적 배경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성공하지 못한 이가 비난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조장한다는 것이다.” (p.68, 프레드릭 제임슨 인용)
정신 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게 된다. 첫째, 원자적 개인화(당신이 아픈 것은 당신 두뇌의 화학작용 때문이다)를 향한 자본의 추진력을 강화한다. 둘째, 다국적 제약 회사에 엄청나게 수익성 높은 시장을 제공한다 (우리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SSRI 로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다). 모든 정신 질환은 신경학적으로 설명되지만 이 설명이 그것들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하다. 가령 우울증이 세로토닌 수치의 저하로 생기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왜 특정한 개인들의 세로토닌 수치가 낮은지는 여전히 설명되어야 할 문제다. 이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도전하고자 하는 좌파에게는 정신 질환을 재정치화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다. (p.70 아낌없이 부려먹기)
“생산과 분배가 재구조화됨에 따라 신경계도 재구조화되고 있다 (Drecarity)”
기업가적 환상사회 (탈서사화 - 비슘페터주의)와 쾌락주의적 우울증(앵무새 - a0 주입)
정신질환을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 -> 원자적 개인화(채무자로서의 개인)와 다국적 제약회사(연구개발, 후원 형식을 띄어 상업화의 은폐, 시장 매커니즘을 부여하는 형식, a -> 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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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수행 평가의 ‘양호’등급이 계속 양호하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는 숱한 노동자에게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p.72 내면의 외재화와 타자의 내재화)
행정 및 규제의 증가와 ‘스마트해지기’ 사이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이 둘은 통제 사회에서 실행되는 노동의 양면을 이룬다. 리처드 세넷은 피라미드식 위계 질서의 수평화가 실제로는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의 증대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p.73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상화된 시장은 '마찰 없는' 교환을 산출하기 때문에 거기서 소비자의 욕망은 규제 기관의 개입이나 중재 없이도 직접 충족될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성과를 평가하고 애초에 정량화하기 힘든 노동 형태를 측정하려는 충동은 불가피하게 추가적인 관리 및 관료주의를 요구했다. 이제 노동자들의 성과나 실적은 직접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audit)를 통해 가시화되는 성과와 실적의 표상이 평가된다. 불가피하게 어떤 단락이 일어나고, 노동은 그 자체의 공
식적인 목표보다는 표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 (p.76 내면화 원리 - 욕망기계)
후기 자본주의는 이처럼 실제적인 성취보다 성취의 상징들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를 반복한다. (p.76 자본의 꿈)
표면상 반스탈린주의를 내세운 신자유주의적 신노동당 정부는 이상한 반복 강박 속에서 동일한 경향을 드러냈다. 정부는 실제 세계의 결과들이 오직 외양(홍보)의 층위에 등록되는 한에서만 중요시되는 그건 계획들을 수행하곤 했다. (p.77 정당정치, 대표 = 인민(권리) = 당 =국가)
자본주의에서는 견고한 모든 것이 홍보 속으로 사라지고, 후기 자본주의는 그것이 시장 메커니즘을 부과한다는 특징으로 정의되는 만큼이나 이 편재하는 홍보 활동을 향한 경향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
(p.78 3차산업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 부가 상품 및 생산에 근거한 삶의 통제)
대타자는 모든 사회적 장에 전제되어 있는 집합적인 허구, 상징적인 구조다. 우리는 결코 대타자 자체와 조우할 수 없다. 대신에 그 대역들만을 대면할 수 있을 뿐이다. (p.79 기술복제 시대의 나르시시즘 - 에피스테메 통제 - 썸이라는 연애의 새로운 형식)
대타자의 한가지 중요한 차원은 그것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홍보가 기능할 수 있는 것도 대타자에 구성적인 이러한 무지 때문이다. 실제로 대타자는 홍보나 선전의 수신자, 즉 개인들 누구도 믿지 않을 때 조차 그것을 믿도록 요구받는 가상의 인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p.79 조현병적 증세로서 앵무새, 역학에 의한 면역학과 파시즘)
현실 사회주의의 일상적 현실을 알지 못한다고 간주된 혹은 알도록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대타자였다. (p.79 사회적 묵인,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전의 소련)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리얼리즘’을 이해하는 한가지 방식은 대타자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다는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다. (p.80 리오타르,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
“비활성 ROM 지휘 통제 프로그램 -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 안보 체계에 집중하고 모든 거시적, 미시적 통치 장치를 떠받치는 - 을 무력화하는 것이 목표인 광범위하게 분산된 매트릭스 - 네크워크화 경향” (p.81 닉 랜드 인용, 생디칼리즘 혹은 파시즘의 부정성 - 이중 규정성)
현실 자본주의는 현실 사회주의를 특정지었던 것과 동일한 분할로 특정지을 수 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사회를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공식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은 사실 부패하고 무자비하다는 등의 널리 퍼진 앎 사이의 분할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적 포스트모더니티는 겉으로 보이는 만큼 완전히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p.82 파편화된 대타자 - 쇼츠형식에 숨겨진 알고리즘 통제)
‘상징적 효력의 위기’ ; 포스트모더니즘이 전제하는 탈신비화 몸짓은 성숙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정말로 상징계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모종의 순진성을 드러낼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로 ‘상징적 효력’은 정확히 물질적 - 경험적 인과성과 상징계에 고유한 비신체적 인과성 사이의 구별이 분명하게 유지될 때 발휘된다. (p.83 역학적 층위에서의 미장센 - 아우라의 외재화로서 자본주의 리얼리즘 - les non-dupes errent)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무매개적으로 현실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생활 다큐나 정치적 여론조사 같은 현상은 언제나 수 없는 딜레마를 부과한다. 카메라의 존재가 촬영되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여론조사 결과의 공표가 투표자들의 미래 행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가? 이런 물음들은 답하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현실'[리얼리티]은 언제나 교묘히 달아나는 것이 된다. 현실은 날것 그대로 포착되고 있는 듯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보드리야르의 신조어로서 많은 오해를 산 ‘하이퍼리얼리티’로 변형된다. (p.85 매개되는 것은 없기에 매개된다는 역설 - 모나드를 창출하는 클리나멘)
우리 시청자는 외부에서 온 권력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호감을 얻는 것이 유일한 과제인 어떤 통제 회로에 통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호감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으로 우리에게 반송된다. (p.85 침식)
관료들을 대할 때 겪는 좌절감은 종종 그 관료들 스스로도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발된다. 이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이미 (대타자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결정을 언급하는일뿐이다. (p.86 Perroquet)
우리는 관료주의적 리비도, 즉 특정 공무원들이 책임을 부인함으로써 얻는 그 향락에 아주 익숙하다 (p.86 소관-유감-규정, 앵무새 d(a) -> a)
카프카가 전체주의에 대한 논평가로 가치가 있는 것은 전제적 지배라는 모델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체주의 차원이 있음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p.87 푸른 하늘을)
어느 누구도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에 개인들은 특수한 몸짓이나 지침이 의미하는 바를 추측할 수만 있을 뿐이었다. 명확한 공식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최종 책임 기관에 호소할 가능성이 원리상으로도 없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그런 모호성이 광범위하게 증대한다. (p.87 무의 욕망)
포스트포드주의에서 감사 문화 auditing culture가 확산된 것은 대타자의 죽음이 과장되었음을 알려준다. (p.88 비상경보기)
새로운 관료주의는 특수한 노동자들이 실행하는 고유하고 한정된 기능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 영역에 침투해 노동자들이 스스로에 대한 감사관이 되어 자신의 성과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p. 빅브라더-대타자, 결과주의의 항상성 - 평가와 노력으로 점철된 과정 - 헤테로토피아의 다층 구조 붕괴)
교육표준행정청에서 하던 감시와 관찰이 대학으로, 궁극적으로는 강사들 자신에게 아웃소싱되면서 이 일이 대학 교육의 (그리고 개별 강사들 심리의) 영구적인 특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p.89 카프카의 표면적인 무죄 선고와 무한한 지연)
표면적인 무죄 선고와 관련해 당신은 하급법원의 판사들이 당신에게 불구속 집행유예를 선고할 때까지 그들에게 진정을 낸다. 그러면 당신은 소송이 재개될 때까지는 법원에서 풀려난다. 반면 무한한 지연은 당신의 소송을 최하급법원에 계류시켜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을 겪게 한다.
(p.90 하버마스 공론장 비판)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책(<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실제로 누군가가 감시 장소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관찰될지 아닐지를 모른다는 사실이 감시 장치를 내면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p.91 감시의 공유화로서 제2 혁명기)
"대안은 없다"는 관념을 불러들이고 "고되게가 아니라 스마트하게 일하기"를 권고하는 것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포스트포드주의에서 노동쟁의의 풍조를 조성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한 강사가 냉소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심사제도를 없애는 일은 노예제를 없애는 일보다 더 불가능해 보인다. 새로운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가 등장할 때만 그런 숙명론을 극복할 수 있다. (p.92 대타자의 서사화로서의 탈서사화 - 알베르 카뮈, 공산주의 속의 제국주의 논리, 헤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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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티의 이율배반들> 이라는 글에서 "공간이나 심리 모두 자유자재로 처리되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전적으로 대체 가능한 현재"라 부른 것에 직면해 있다
(p.93 가변과 유동의 현실로의 예속 - les non dupes errent)
자신이 전날의 이야기를 반박하고 있다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야기가 있었음을 그저 흐릿하게 기억할 뿐인 것 같았다. (p.94 중간 관리자의 하루시차를 둔 언행불일치 ; ne-pas 역동의 상쇄로서 망각의 유도, 돈은 벌어야 한다는, 반발력만이 존재함 - 수직적 구조의 내재화 - 나르시시즘의 외재화)
이 관리자는 내적인 주관적 태도상으로는 자신이 감독하고 있는 관료주의적 절차들에 적대적이고 심지어 경멸하지만 외적인 행동 측면에서는 완전히 순응적이다. 노동자들이 무의미하고 비도덕적인 노동을 계속 수행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확히 감사 업무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인 심리적 거리 두기다
연속적이거나 동연(同延)의 공간에 있으면서 그처럼 명백하게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믿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지만 우리는 칸트, 니체, 정신분석학 등 덕분에 깨어 있는 경험도 꿈꾸는 경험만큼이나 그런 서사적 검열(screening narrative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재가 참을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구축하는 어떤 현실도 일관되지 않은 조직체일 수밖에 없다. 칸트, 니체, 프로이트는 우리의 일상적인 작화가 합의된 것임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삶은 한낱 꿈일 뿐'이
라 말하는 따분한 클리셰와 구별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우리 마음의 내면에서 투사된 유아론적 환영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당황시키기보다는 위안을 주는데, 이 관념이 전능함에 대한 우리의 유년기적 환상들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른바 내면성이 그 실존을 어떤 허구적인 합의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기이한 혐의를 수반할 것이다. (p.96 a1과 a0의 차이, 일종의 빨간약, 이념 추동 밎 생멸의 장으로서의 꿈-무의식, 라캉 주체)
개인적인 역사를 잃어버린 제이슨 본(cia 암살공작 요원, 근데 기억을 잃은)은 서사적 기억은 결여하고 있으나 우리가 형식적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즉 일련의 물리적 반사 동작이나 틱tic
에 문자 그대로 체현되어 있는 ㅡ기술, 실천, 행동 등에 대한ㅡ 기억은 간직하고 있다. (p.101 심기체 리비도 분배로서의 body schema, 만사화개화락화).
포스트모던 노스탤지어 양식에서는 동시대나 심지어 미래를 참조하는 내용으로 인해 형식의 층위에서는 이미 확립되어 있거나 구식이 된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흐려진다. 한편으로 이는 현재적인 것과 즉각적인 것만을 특권화하는 문화다. 미래뿐 아니라 과거의 방향으로도 장기적인 것은 근절된다(예를 들어 미디어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한 주 정도 주의를 독점한 다음 곧 망각된다) (p.101 제이슨 본 처럼 ‘기관없는 신체’로서 착취당하는 인간, 반발력의 제한, 병속의 벼룩)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역설은 사회적 삶의 모든 층위에서 볼 수 있는 전대미문의 변화 속도와, 그런 변덕스러움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온갓 측면 ㅡ소비 제품에 느끼는 감정, 인위적 공간에 고유한 언어 등ㅡ 에 있어서의 전대미문의 표준화가 병존한다는 것이다. (p.102 파편화와 종합 - 프랑크푸르트학파, 호르크하이머의 파시즘 분석)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 이것이 포스트모던한 곤경을 짚어 주는 간명한 정식이다. (p.103 인스타 ‘스토리’에서 드러나는 거대서사의 상실)
꿈을 꿀 때 우리는 망각하지만 곧바로 우리가 망각했다는 사실도 망각한다. 우리의 기억 안에 있는 간극과 공백은 포토샵으로 처리되듯 지워지기 때문에 우리를 괴롭히거나 고문하지 않는다. 꿈 작업이 하는 일은 작화된 일관성을 생산함으로써 이상 현상과 모순 들을 감추는 것이다. (p.103 나르시시즘 - 정보 취합의 파생물로서의 ‘꿈’ ;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정식화 되어버린 ‘기관없는 신체’)
동시대의 권력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모델이 바로 꿈 작업이라고 주장했을 때 웬디 브라운은 이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p.103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간의 동맹 ; 제2혁명기의 결말)
의미의 세계를 비우고 삶을 밀어내거나 그 질을 떨어뜨리며 공공연하게 욕망을 착취하는
기획은 의미를 고정하거나 강화하고 일정한 삶의 방식들을 보존하며 욕망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데 집중하는 기획과 어떻게 교차하는가? (p.104 웬디 브라운 인용 ; 피지배 시민으로의 프레스적 공정)
선택하는 주체와 지배받는 주체는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지식인이나 그들에 앞서 플라톤은 개인적 선택과 정치적 지배의 양립 가능성을 이론화했다. (p.105 대타자)
브라운의 논점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기이한 종합은 이 둘이 공유하는 혐오 대상, 즉 이른바 보모 국가와 그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반국가주의적 수사를 피력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2008년의 은행 긴급 구제가 입증한 것처럼) 실제로는 국가 자체가 아니라 국가 자금의 특수한 사용 방식에 반대한다. 한편 신보수주의가 원했던 강한 국가는 그 기능이 군사 및 치안 영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신보수주의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허문다고 간주된 복지국가와의 대립 속에서 스스로를 정의했다. (p.105 무한소와 무한대의 합작 - 앵무새와 마술사의 서커스, 빵 앞의 노동자이자 관람자,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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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회사들이 보험료를 인상하면 사람들은 보험료를 인상한 보험회사 또는 홍수가 일어나기 쉬운 계곡에 살면서도 그만큼의 추가금을 지불하기 싫어하는 이들이 아니라 홍수 방비에 충분한 예산을 쓰지 않은 정부를 비난한다. (p.107 개돼지)
미디어는 위기의 체계적인 원인 대신에 개별 은행가들의 월권행위와 정부의 위기 대응 방식에 초점을 맞췄다. (p.107 리비도 재분배 - 카덱시스 ; 조중동의 생존방식 ; 언론가는 분쟁을 원한다)
하지만 정부에 초점을 맞추면 비도덕적인 개인들에게 초점을 둘 때와 마찬가지로 문제를 굴절시키게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p.107 호르크하이머 - 원한감정과 자연폭동 그리고 카덱시스의 양상으로서 파시즘)
사람들은 이제 소비자로 호명되고 (또한 웬디 브라운이나 다른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정부 자체가 일종의 상품이나 서비스로 제시되고)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시민으로(시민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p.108 중첩적 작용 - 가면 뒤의 가면)
한편에 서비스들이 순탄하게 제공되는 현실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전적으로 다른 현실, 즉 콜센터의 그 미친 듯한 카프카적 미로, 어떤 기억 없는 세계가 있다. (p.108 조숙아의 연장 - 기술 복제시대)
자신이 홍보하는 내용에 부응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콜센터보다 더 잘 예시해 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콜센터에 대한 불쾌한 경험이 보편적이더라도 자본주의가 본래부터 효율적이라는 가정이 깨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p.109 개돼지)
활기찬 어조의 홍보에 말문이 막히면서 느끼는 따분함과 좌절감, 상담원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어 상담원을 바꿔 가며 똑같은 세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 들어야 할 때의 답답함, 책임자가 없기 때문에, 즉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바로 알게 되듯) 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라도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력하게 기다리면서
쌓여 가는 노여움 등이 그런 현상이다 (p.109 관료주의적 완벽성과 대타자의 강박 - 주입)
분노에 적절한 대상이 없듯 분노가 초래하는 공격 역시 아무 효과도 낳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무반응이고 비인격적이고 중심이 없고 추상적이며 단편적인 체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자본의 인위적인 우둔함을 한껏 가까이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p.110 쓸만한 바보와 벙어리들)
카프카의 비범한 천재성은 자본에 고유한 부정무신론(negative theology 에서 negative atheology)을 탐사했다는 점이다. 중앙은 행방불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찾거나 정립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질 수 없는 무엇이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p.112 비어있는 중심, 중심 없는 중심이 아닌 탈중심, 기획된 노마드)
오늘날 모두가 재활용한다고 가정된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든 누구도 이 명령에 저항해서는 안된다. (p.112 공통자, 공동체주의 저편으로 숨어버린 전체주의, 다수의 마조히스트와 소수의 사디스트로 완성되는 봉건주의 전통, 질식사)
그러나 존스의 주장에 의하면 재활용한다고 가정된 주체는 재활용한다고 가정되지 않은 구조를 전제한다.즉 재활용을 '모두'의 책임으로 만들 때 구조는 자체의 책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난다. (p.113 용이불존이존 - 관념론의 역학적 질서/ 대타자의 비실재성에 의한 실재성 - 책임의 개인화 과정)
각 개인 모두가 기후 변화에 책임이 있으며 우리가 각자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아무도 책임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생태 재앙의 원인은 어떤 비인격적인 구조다. 그 구조는 온갖 방식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는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주체, 즉 집합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직면해 있는 전 지구적인 다른 모든 위기와 마찬가지로, 생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주체가 구축되어야 한다. (p.113 권리와 다중 속의 초인, 진정한 만인투쟁)
영화는 결코한 명의 악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영화 속 음모의 이해관계나 동기가 기업과 결부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주어지지는 않는다(어쩌면 영화에서 음모에 연루된 사람들 자신도 그 이해관계나 동기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p.115 ‘제작진, 지들도 모른다’ 알면 미치거든)
부푼 희망으로 새로이 경영진으로 올라선 많은 사람이 하는 착각은 정확히 그들 개인이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인은 자신의 관리자들이 해 온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며 사태가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누구든 경영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리 오래지 않아 권력의 잿빛 화석화에 포섭되기 시작한다. 구조를 감지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다. 즉 우리는 여기서 실제로 구조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을 통해 말하는 구조의 무감각한/무감각 해지게 만드는 판단을 들을 수 있다. (p.118 탈구조주의,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의 필요성)
슬라보예 지젝이 주장하듯 이는 신용 위기가 대두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계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활용하고 있는 윤리적인 것의 유혹이다. 이 경우 비난의 대상은 체계 자체가 아니라
이른바 병리적인 개인 및 이들의 '체계 남용'이 될 것이다. (p.118 오직 개인의 문제로 환원.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회피의 두 절차;
1. 암묵이든 공공연하게든 처벌받을 가능정이 있을 때만 환기될 것
2. 남용이나 잔혹이 곳곳에 편재한 것으로 간주, 책임을 물을 수 없게된다.
분명 법률상 기업은 개인[법인]으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기업이 각기 독립체이기는 하지만 개별적인 인간과는 다르며, 따라서 기업을 처벌하는 것과 개인을 처벌하는 것 사이의 어떤 유비도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p.119 인위적 거리두기)
기업들 자체는 주체-가-아닌-궁극적인 원인, 즉 자본에 의해 제약되어 있는 것이자 자본의 표현이다.
(p.119 전체로 부터의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개인으로부터의 개인의 문제 / ne의 추둥적 작용 - 서사화)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부모들이 쾌락원칙의 궤적, 즉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길을 따르는 데서 유발된다. 금방 익숙해지는 편한 생활을 추구하는 가운데 부모들은 아이의 모든 요구에 응하게 되고, 이 과정은 점점 더 압제적인 것으로 변한다. (p.121 닭과 달걀의 순환고리, 욕망의 혼재적 작용 - 사회 관념 프로파간다에서 나르시시즘으로 문화적 개입)
의무라는' 부성적' 개념이 즐기라는 ‘모성적' 명령에 포섭되어 온 문화에서는 부모가 향락을
누릴 아이의 절대적 권리를 조금이라도 방해하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p.121 맞벌이의 억압적 기능, 자유를 가장한 방치)
스피노자의 설명에 의하면 신이 사과를 먹은 아담을 비난한 까닭은 그 행위가 잘못이기 때문이 아니
다. 신은 사과가 아담을 독으로 해칠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이 보기에 이는 아버지 기능의 종결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행위가 잘못인 이유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는 그 행위를 실행하면 우리에게 해로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뿐이다. (p.122 연대 책임 - 테오디세이자 외설적 초자아)
버로스처럼 스피노자는 중독이 일탈적 상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표준 상태임을 보여 주는데, 이 인간 존재는 (자신들 및 세계의) 얼어붙은 이미지에 의해 습관적으로 반응적, 반복적 행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란 우리가 우리 행위의 실제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때
만, 우리를 취하게 만들고 도취시키는 '슬픔의 정념들'sad passions을 물리칠 때만 성취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p.123 점입가경의 코나투스, 물질과 기억)
후기 자본주의가 자신의 금지 명령 상당수를 건강(의 어떤 판본)에 대한 호소로 표현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123 오래 오래 부려먹을 노예 유지, 생명정치의 일환)
가령 정신 건강이나 지적인 성숙의 문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대신에 우리는 '좋은 느낌을 주고 좋아 보이는 것'이 전부인 환원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건강 모델을 본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체중을 줄이고 어떻게 집을 꾸며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모종의 문화적 개선까지
요구하면 그것은 억압이고 엘리트주의다. (p.124 멘헤라 유행/ 조울증 상태의 노예들)
정말이지 문제는 특정 유형의 이해관계만이 적절한 것(합의된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이유로)으
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체중 감량, 집 꾸미기, 외모 가꾸기 등은 '합의적 감성의'consentimental 체제에 속한다. (p.124 저마다의 빛을 잃도록 만드는 사회구조와 억압. 노예상태의 주체, 권리의 권력으로의 봉헌)
텔레비전은 누가 선한 감정을 품고 있고 누가 악감정을 품고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악감정을 품은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포옹과 키스'로 치유되죠. 텔레비전은 정말이지 도덕을 안내하는 체계가 아니라 감정을 안내하는 체계입니다. (p.125 애덤 커티스 인용, 데카당을 읽지 못함 - 정신적인 자가 복제이자 빼로케의 영역)
도덕성은 감정으로 대체되어 왔다. 커티스의 주장에 의하면 "자아의 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종의 유아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 (p.125 대타자 ; 자유와 사랑으로 속박을 풀어 해친 끝에 마주한 운명, 비극, 고통/ 하지만 양팔 벌려 조우하는 자신만의 신성이 아닌 그저 타자의 시선에 침체된 감정쓰레기통이자 빈곤포르노)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즉 개인주의의 세계 안에서 모두가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의 상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송인으로서 우리 일은 사람들이 자기 자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퇴보할 테죠. (p.125 애덤 커티스, 메시아는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 공권의 연속, 진리는 존재하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은 작은 자아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실제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루퍼트 머독도 어떤 점에서는 자아의 덫에 걸려 있어요. 자아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그의 일이죠. (p.126 애덤 커티스, 정신 딸딸이)
블로그는 사이버공간 외부의 사회적 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새로운 담론 네트워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옛 미디어가 점점 더 홍보에 포섭되고 소비자 보고서가 비판적 논고를 대체하는 상황에서 일부 사이버공간 영역은 다른 곳에서는 맥 빠진 채 만연해 있는 '비판의 위축 상태'에 저항하도록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참여의 상호 수동적 모사, 마이스페이스와 페이스북에서 보이는 네트워크 나르시시즘 등은 대체로 반복적이고 기생적이며 순응적인 내용을 생성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성주의적인 것에 대한 미디어 계급의 거부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가득한 상향식 문화가 아니라 점점 더 유아화된 문화를 낳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청자를 성인으로 대하면서 이들이 복합적이고 지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문화 생산물에 대처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쪽은 부성주의 문화다. (p.127 부성주의, 지장의 아곤 결여)
사람들에게 이미 그들을 만족시켜 주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예술가와 미디어 전문가, 말하자면 모종의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만이 이런 욕망을 제공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슈퍼 보모는 제한을 부여하는 자, 우리가 우리의 이해 관계를 스스로 인식할 수 없을 때 우리를 위해 행위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고 낯선 것과 그에 대한 우리의 욕망에 내기를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기도 할 것이다. (p.128 아곤)
공적인 것이 소비를 위한 것으로 대체되면서 그런 혁신들은 이제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구조적 불안정성이 지속되고 '장기적인 것이 말소된’ 결과는 언제나 혁신이 아니라 침체와 보수주의다. 이는 역설이 아니다. (p.128 연속성, 리듬감이 없는 그저 가면 바꿔치기, 기만적인 가면 무도회)
“문화적 반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안정성이 필수적” (p.129 일즉다 다즉일, 합일될 수 없는 합일, 단 하나도 둘도 아닌 문제)
진정으로 새로운 좌파의 목적은 국가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일반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p.129 르포르, 직접 민주주의)
이는 자연스럽게 바로 그 일반의지라는 개념 자체를 소생시킬 필요를, 개인 및 그들 이해 관계의 종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적 공간이라는 관념을 되살리고 현대화할 필요를 수반한다. (p.130 일시적 종합, 이내 미분과 적분을 반복하는 생명성, ne-pas 역동)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관이 지닌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공적인 것과 같은 통념들을 '유령'으로, 내용 없는 환영적 추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애덤 스미스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철학만큼이나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도 전제하고 있다. 실재하는 것이라고는 개인(과 그들의 가족)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이 실패하고 있다는 징후는 10대들이 서로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 버리고 병원에서는 공격적인 슈퍼 박테리아'가 생성되는 와해된 사회 영역 어디에나 나타난다. 필요한 일은 결과를 구조적 원인과 연결하는 것이다. 거대 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적 원인 즉 자본의 효과라고 재단언 해야한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또한 지리학적으로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전략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발전시키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p.130 영구혁명론)
은행 긴급 구제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가져오기는커녕 대안은 없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주장을 대규모로 재단언하는 것이었음이 곧바로 명백해졌다. 은행 체계가 와해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
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여겨졌다. (p.131 최후의 인간)
자본주의에 대한 일관되고 신뢰할 대안이 없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앞으로도 정치 경제적 무의식을 지배할 것이다. (p.131 대책이 없기에 대책은 있을 수 있다 - 관념을 일하게 할 것)
신용 위기가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종언을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 위기는 특정 형태의 정신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p.131 알렉스 윌리엄스의 ‘다시 영년 year zero’ / 구약과 신약)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출현할 하나의 공간이 마련되었고 여기서는 반드시 옛 언어나 전통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좌파의 악습 중 하나는 역사적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것, 자신이 정말로 믿고 있는 미래를 계획하고 조직하기보다는 크론슈타트 봉기나 신경제정책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의 반자본주의 정치 조직화 형태의 실패가 절망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패의 정치를 향한, 패배한 주변성이라는 편리한 입장을 향한 낭만적 애착을 버릴 필요가 있다. 신용 위기는 하나의 기회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거대한 사변적 시험대로, 회귀가 아니라 갱신을 위한 하나의 원동력으로 여겨져야 한다. (p.132 진솔함의 알레아)
알랭 바디우가 단호하게 주장하듯 실질적인 반자본주의는 자본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본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전자본주의적 영토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반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진정한 보편성을 통해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해야 한다. (p.132 포스트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1968년 이후 노동 계급의 욕망을 병합함으로써 승리했다면, 새로운 좌파의 실천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었으나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욕망들에 기반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면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두드러지는 사악인 관료제의 대규모 축소를 이물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필요한 것은 노동 및 누가 노동을 통제할지를 둘러싼 투쟁이다. (관리에 의한 통제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자율성을 단언하고 이와 더불어 (포스트포드주의에서 노동의 핵심 특징이 된 과잉 감사와 같은) 특정 종류의 노동을 거부해야 한다. 이는 이길 수 있는 투쟁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구축될 때만 그럴 수 있다. (노동조합 같은) 옛 구조들이 그러한 주체성을 양성하게 될지, 이 주체성이 전적으로 새로운 정치적 조직화를 수반하게 될지는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다. 관리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형태의 투쟁 전략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가령 교사와 강사는 파업(혹은 성적 입력 거부) 전술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 전술은 학생 및 구성원을 다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한때 내가 일했던 대학에서 경영진은 일일파업을 상당히 반겼다. 무시할 만할 혼란만 야기하고는 임금 지출을 절약해 주었기 때문이다) 관리 차원에서만 필요할 뿐인 노동 형태들, 모든 면에서 교육에는 전혀 효과가 없지만 관리주의는 그것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모든 자기 감시 기계에서 전략적으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p.133 스펙터클의 영역을 떠나 실제적 세밀을 요하는 삶으로, 무주의 영지로)
우리는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 건강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해야 한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감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불만은 외부로 방향을 돌려 실제 원인인 자본을 겨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p.134 빠뜨롱 나오라 그래)
하지만 불편한 사실은 소비자의 자기 규제나 시장에 기대는 방식만으로는 환경 재앙을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고행에는 실천적인 정당성뿐 아니라 리비도적인 정당성도 있다. 올리버 제임스, 슬라보예 지젝, 슈퍼 보모 등의 사례가 알려 주는 것처럼 무제한
적인 방종이 비참과 불만을 야기한다면, 욕망을 제한할 필요성은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p.134 에피쿠로스 학파,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이 집합적인 관리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는 역시나 열린 물음으로 오직 실천과 실험을 경유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p.135 망설이지 말것)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경제적 가능성의 희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 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p.135 제3 혁명 선언)
첫째는 신자유주의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선전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유주의적 지배에 적응하는 것은 실용적인 생존의 문제일 뿐 결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통념을 유포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데올로기는 비정치적으로 보일 때, 그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처럼 보일 때 가장 강력합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가장 강력할 때 그것은 언
제나 이런 탈정치화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p.138)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좌파의 병리 현상입니다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