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목적이 없다는 것, 즉 인식할 원인이 없듯이 소원할 목적도 없다는 것이 바로 제대로 놀이를 하기 위한 확신이다. (NP-p.65, 도박꾼과 기책사)
소유하는 것은 형태를 강요하는 것, 결과들을 활용해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p.91, 생성의 생성)
차이를 부정하는 노력은 삶을 부정하고, 현존을 비하하고, 우주가 미분화된 것 속에서 파멸하는 (칼로리적 차원에서의 혹은 다른) 죽음을 그것에게 약속하는 데 있는 보다 일반적인 시도에 속한다. (p.96, 아디아포리adiaphorie)
관계 속에 있는 힘들은 이중적이고 동시적인 생성을 가리킨다. (p.105, 불이의 논리와 '너'의 종교성)
철학의 기술이 그만큼 복잡하면 할수록, 해석과 평가의 문제들은 서로를 참조하고 서로 연장된다. (p.110, 화쟁)
반응적 힘들이 우월한 힘을 구성하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힘을 <분리시키면서> 승리함을 보여준다. (P.114, 제2혁명기 이후 신자유주의)
노예는 승리할 때도 계속해서 노예이다. (P.117, 동일자의 반복에 따른 수렴, 사실숙명주의faitalism)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해석만이 존재한다. (VP.2.133, 진가불이)
환자의 관점에 서서 보다 건전한 개념들, 보다 건전한 가치들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와 반대로, 과도하게 충만된 삶이 소유하고 있는 충만과 자기감정을 의식한 채 퇴락의 충동의 비밀스러운 노동 속에 시선을 던지는 것. (EH.1.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원회귀만이 허무주의적 의지를 완전하고 전적인 의지로 만든다. (p.134, 무의 무화)
적극적 부정, 적극적 파괴는 자신들(강한 정신들)의 몰락에의 의욕을 각오하면서, 반응적인 것을 영원회귀의 시련에 종속시키고, 그 시련에서 자기 자신들을 제거하면서, 반응적인 것을 자신 속에서 파괴하는 강한 정신들의 상태이다. (p.136, 적극적 부정 - 반항 牙, 殺龍而卽生龍)
본질, 존재는 투시도적 실재이고, 복수성을 가정한다. (p.146, 가면뒤의 가면)
의욕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 감정, 사유의 기원적인 동시에 비판적인 심급이다. (p.148, 기관 없는 몸)
사람들이 우리에게 권력 자체로서 소개해 보이는 것은 단지 노예가 자기 자신에게 만들어주는 권력의 표상일 따름이다. (p.151, 자본주의와 생산, 등록,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표상이란 개념은 철학을 독살시킨다. 그것은 바로 노예의 산물이고, 또한 노예들의 관계의 산물이며, 권력에 대한 최악의 해석, 가장 빈약하고 가장 저속한 해석의 본질을 이룬다. (p.152, 칸트 공통인식과 제1혁명, 권력의 무거움과 권리의 가벼움, 데카당스)
표상된 권력은 단지 외관일 뿐이다. 의지의 본질은 외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는 한, 그것이 원하는 바의 상태에 있지 못한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의지에게 그것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고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한계, 합리적이거나 모순적인 한계를 약속한다. (p.155, 생명정치)
그것(ce qui veut, 원하는 것-권력)은 해석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p.158, 화엄)
정신(가이스트)은 교회나 국가와 같은 모든 권력과 즉각적으로 타협하는 힘들을 감추는 것 같다. (p.164, 주노 변증법)
인식의 환상은 없지만, 인식 자체는 하나의 환상이며, 인식은 오류이고 설상가상으로 왜곡이라는 것이다. (p.167, 인타라망과 관점주의perspectivisme)
이성이 자신을 위해서 사유에 복종하는 것의 권리들을 거둬들이고, 표현하기 때문에, 사유는 자신의 권리들을 되찾고 이성에 반대해서 자신을 입법자(주사위 던지기)로 만든다. (p.172, 르포르의 권리와 주체, 기책사와 영구혁명)
추월당하고 극복당하길 원하는 한에서의 인간. (p.173, 萬事花開花落話)
연역에서 연역으로, 판결에서 판결로의 진리의 기독교적 충동은 결국 가장 가공할 연역에,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판결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그 의문을 제기할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진리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p.180, 죽지않는 것은 시체다.)
둘 다(agape와 ananke) 서로서로를 이끌면서, 한계를 부수면서, 하나를 위해 한걸음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위해 한걸음씩, 전대 미문의 창조의 노력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p.184, 춤)
삶의 활동은 사기치고, 숨기고, 현혹시키고, 유혹하는 어떤 거짓의 힘(puissance)과 같다 (p.187, 萬法假之戴脫)
우리는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의미와 우리가 믿는 것의 가치와 관련해서 진리들을 소유한다. (p.189, Ne와 Pas)
철학은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나 교회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권력에 봉사하지 않는다. 철학은 침울하게 하는 데 이용된다. 아무도 침울하게 하지 않고 아무도 언짢게 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p.192, 주인공)
활동성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항상 사유의 거듭제곱puissance이고, 어떤 능력의 자연적 발휘가 아니라 사유 자체 속에서, 사유 자체를 위한 특별한 사건이다. 사유하는 것은 사유의 n제곱이다. 여전히 그것을 제곱해야만 하고, 그것은 <가벼운 것>, <긍정적인 것>, <무용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힘들이 그것에 어떤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제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폭력이 사유인 한에서의 그것에 가해져야만 하고, 어떤 권력Une puissance이 그것을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그것을 적극적 생성 속으로 던져 버려야만 한다. (p.196, 파이데이아로부터 발산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문화의 종적 활동은 하나의 최종 목적 - 즉 예술가, 철학자를 만드는 것 - 을 가지고 있다. (p.198, 르상티망)
심리학의 잘못은 망각(므네모시네)을 부정적인 성향으로 다루어서 그것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특징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p.204, 안티오이디푸스, 서사)
질병 자체가 원한의 한 형태이다. (p.206, 반작용의 흥분 대체와 위상학-수렴적 환경으로 인한 대-탈 의 제한, 곪음.)
흥분은 좋은 것일 수 있고 원한의 인간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만 한다. (p.209, 스피노자, 견심성불)
원한은 약자인 한에서의 약자의 승리이며, 노예들의 저항이고 노예인 한에서의 그들의 승리이다. (p.211, 무능력, 에코이스트, 앵무새)
원한의 인간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의 악의가 아니라, 그의 혐오스러운 적의, 그의 경멸하는 능력이다. (p.211, 농노, 노비, 소작농, 직장인)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Tu es méchant, donc je suis bon. 노예의 근본적인 정식이 그러하다. (p.214, 라캉적 주체, 주인 - Je suis bon, donc tu es méchant.)
긍정하고 행동하는 자는 동시에 존재하는 자이다. (p.215, 호모 루덴스)
꿈들의 세계가 현실을 반영하는 데 반해, 허구들의 세계는 그것을 왜곡하고 비하하고 부인하게 만들 따름이다. (p.224, les non dupes errent)
나는 사제의 심리학의 창시자이다. (p.227 원문 - 이사람을 보라, 상징계(수학, 종교, 이성)라는 꿈에 속지 않는 자들은 방황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방황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대타자의 욕망이 아닌, '너'라는 살아있는 실재를 발견할 수 있다.)
<출구를 갖지않으려는 모든 충동, 억압적인 어떤 힘이 밖에서 폭발하는 것을 막으려는 충동은 안으로 돌아선다. 바로 그것을 인간의 내재화라고 부른다. 그것이 바로 가책의 기원이다> 그점에서 가책은 원한을 계승한다. (GM. 2. 16, p.228)
가책의 첫번째 정의는 힘의 내재화에 의한, 힘의 내부로의 투사에 의한 고통의 배가이다. (p.230, 내부발산으로 인한 구조적 폭력, 호르크하이머와 막스 베버, 힘의 내재화에 의한 고통의 배가 -> 원한의 방향 전환에 의한 고통의 내재화)
현존은 고통이 현존 속에서 의미를 갖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p.231, Co In. 2. 기책사의 사명, 운명애)
잔인성 없이는 즐거움도 없다. 우리에게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장구한 역사가 가르치는 바가 그것이다. 그리고 처벌은 또 축제의 몸짓들이었다. (p.232, GM, 2.6, 삶은 거대한 폭력이자 거룩한 아름다움.)
원한의 모든 힘은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죄지은 자들을 신에게 이르게 한다. (p.234, 경쟁과 피로사회, 다람쥐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
문화는 굴레들, 고문들, 인간을 훈련시키는 데 이용되는 잔혹한 수단들과 구분될 수 없다. (p.236, 구조주의)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이 야기한 손실을 지불하는 인간, 부채에 대한 책임자로 여겨지는 인간, 반응적 힘들의 책임자로 다루어지는 인간이 바로,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 문화에 의해서 사용될 수단이다. (p.239, 그리스적 서사시)
정의는 인간의 반응적 힘들을 훈련시키고, 그것들을 영향받을 수 있게 만들며, 인간을 그 능력 자체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는 종적 활동이다. (p.241, Ne와 Pas의 결합)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으로 공격적이기까지한 인간은 여전히 반응적 인간보다 백 배 더 정의에 가까이 있다. (p.241, 베르그송과 메를로 퐁티)
만약 우리가 지금 인간사를 선행하는 그 무수한 세월을 참고한다면, 우리는 과감히 바로 처벌이 억압적인 권위들의 희생자들에게서조차 죄의식의 발전을 가장 강력하게 지체시켰다고 주장할 것이다. (p.241, GM, 2.14, L'Homme révolte, 단두대에 대한 성찰)
문화의 산물은 법에 복종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운명에 대한, 법에 대한 권력에 의해서 정의되는 주권자이고 입법자인 개인이다. (p.243, 각자의 다르마, 입법주체-용 와 제행무상-공)
법앞의 책임성으로서의 책임성, 정의의 법으로서의 법, 문화의 수단으로서의 정의, 이 모든 것은 문화 자체의 산물 속에서 사라진다. 풍속의 도덕성은 풍속의 도덕성에서 해방된 인간을 낳고, 법의 정신은 법에서 해방된 인간을 낳는다. 그래서 니체는 정의의 자기-파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문화는 인간의 종적 활동이다. 하지만, 그 모든 활동이 선택적일 때, 그것은 종적인 것 자체가 그 속에서 제거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개인을 낳는다. (p.243, 서사시, 다르마, 푸르른 용)
역사속에서의 종적 활동은 그것을 변질시키고 그것의 산물을 변질시키는 어떤 운동과도 분리되지 않는다. (p.244, decaden과 révolte, 반헤겔-안티크리스트, 무리들troupeuaux, Z - 전복하도록 방치하라)
더 이상 사람들이 부채를 갚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그것에 묶고,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다. (p.249, 이노센티카로서의 입법주체, 강자)
무리들이 있는 도처에, 그것들을 원했던 것은 나약성의 충동이고, 그것들을 조직한 것은 사제의 능력이다. (p.250, GM, 3.18, 족장사회)
니체가 우리에게 적극적 종교, 강자들의 종교, 원한도 가책도 없는 종교에 대해 말할 때마다, 종교가 자신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의 힘들(역사, 세계정신)에 의해서 소위 종속되어(예수회와 제국주의) 있어 자신의 가면을 스스로 벗을 수 없는 상태가 문제이다. 즉 <철학자들의 손 안에 있는 선택과 교육의 방법>으로서의 종교가 문제(칸트의 공통자)다. (p.253)
금욕적 이상의 의미는, 허무주의와 반응적 힘들의 유사성을 표현하고, 허무주의를 반응적 힘들의 동력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다. (p.255, 생명정치)
비극적 명제는 종합적이므로 본질적으로 복수적이고 유형적이며 미분적이다. (p.268, 영원-회귀, 권력-의지, 모순자의 결합과 장론적 형성)
가책과 원한을 넘어서서, 예수는 반응적 인간에 교훈을 제공했다. 그는 그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쳤다.그는 가장 흥미롭고, 가장 유순한 타락자였다. 예수는 유태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지만 불교도였다. (p.273, AC 31, 만사화개화락화)
변증법은 해석을 간단하게 다루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징후들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한다. (p.276, 유물론적 자본주의의 허점, 금간벽)
신의 죽음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인간은 <그인 자 quil il est>로, 신은 <그것인 바 ce qu'il est>로, 즉 반응적 힘들과 무의 의지였다. (p.278, 헤겔-바우어-포이어바흐-슈티르너)
상대적 재점유들은 여전히 절대적 소외들이다 (p.281, 슈티르너의 한계)
니체의 비판은 우연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자체에 도전한다. (p.290, 제3 혁명)
그림자는 목적을 상실했다. 그가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도달한 목적 자체가 상실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p.293, 구실의 역할)
무의 의지에 의해서, 그속에서만 반응적 생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긍정하는 의지에 의해서, 그 속에서만 적극적 생성이 존재한다 (p.294, 공과 용)
신은 인간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연민은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우월한 인간에 대한 연민은 제 차례가 되면 차라투스트라를 죽게 만들지도 모를 그에 대한 유혹이다 (p.295, 순자적 세계관, 성인의 대물림)
사람들은 가치들을 전복시키는 대신에 가치들을 바꾸고, 그것들을 교대시킨다. 그것들이 파생되는 허무주의적 관점을 지키면서 말이다. (p.296, 수정주의, 칸트이성-헤겔정신-하이데거 기투-하버마스절차)
부정의 왕국에서는 항상 삶 전체가 비하되고, 반응적 삶이 특별히 승리한다 (p.298, 쇼펜하우어)
허무주의는 권력의지의 성질로서의 부정이다 (p.299, 空卽生龍공즉생용, 龍卽生空용즉생공)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틀림 없다면 우선 서로 증오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만약 네가 나를 긍정으로 느끼고, 긍정인 나와 혼인하며 나를 긍정으로 생각함이 틀림 없다면 너는 나를 부정으로 인식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p.301, DD, <아리아드네의 불평>, 4컷용사)
반응적 힘들은 무의 의지와의 동맹을 파괴하고 무의 의지는 제 차례가 오면 반응적 힘들과의 동맹을 파괴한다. (p.302, 殺龍而卽生龍)
적극적 파괴는 무의 의지의 변환의 지점, 순간을 의미한다. 파괴는, 반응적 힘들과 무의 의지 사이의 동맹이 결렬될 때 후자가 개종하고, 긍정affirmation의 편으로 가면서 반응적 힘들 자체를 파괴하는 긍정하는 힘puissance d'affirmer과 관계를 맺는 순간에 적극적active이 된다. (p.303, 三界龍空之爭)
부정은 전적으로 자신의 기체 속에서 개종되며, 그것의 성질 속에서 전환되고, 그 자신의 힘puissance이나 자율성의 무엇도 존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저속함에서 고귀함으로, 고통에서 기쁨으로의 개종이며, 춤, 놀이, 웃음의 삼위일체, 그와 동시에 무의 화체, 부정의 전환, 부정의 가치 전환이나 힘puissance의 변화이다. (p.305, L'Homme révolte)
부정이 군림하는 동안, 사람들이 이 아래서, 또 어떤 다른 세계 속에서 긍정의 낱알을 찾는 것은 헛될 것이다. 사람들이 긍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의 사슬을 뒤흔들고 있는 기괴하고 서글픈 유령이기 떄문이다. (p.306, 변증법)
두 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즉 긍정하는 힘에 속하고 긍정 그 자체의 존재 방식인 두 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긍정이 필요하며, 또 긍정으로 충분하다. (p.311, 원한-가책-부조리-반항)
세계는 참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계는 권력의지이며, 다양한 힘puissance들 아래서 실현되는 거짓의 의지 volonte du faux이다. 어떤 힘puissance 아래서든지 거짓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항상 평가하는 것이다. 사는 것은 평가하는 것이다. 사유 세계의 진리도, 감각세계의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평가이고, 특히 감각될 수 있고 현실적인 것 조차 평가이다. (p.318, 만사화개화락화)
존재, 진리, 현실 자체는 평가로서만, 말하자면 거짓말로서만 가치가 있다. (p.318, 진가불이, 형용사의 세계)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맡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p.31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존재(용)와 무(공)는 단지 권력의지의 성질qualia 로서의 긍정과 부정의 추상적인 표현일 뿐이다. (p.321, 서사의 미분학)
디오니소스적 생성은 존재이고 영원이지만 상응하는 긍정 자체가 긍정될 때의 한에서이다. 존재의 영원한 긍정, 나는 영원히 너의 긍정이다. (p.323, 찰나의 영원성과 '너'의 종교학)
생성은 존재이고 다수는 하나이며, 우연은 필연이다. 생성의 긍정은 존재의 긍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을 새로운 힘으로 인도하는 두번째 긍정의 대상인 한에서이다. 존재는 생성으로, 하나는 다수로, 필연은 우연으로 일컬어진다. (p.325, 삼계용공지쟁에 만법가지대탈)
부정은 존재의 문에서 사라진다. 대립은 그것의 노동을 중단한다. 차이는 그것의 놀이를 시작한다. (p.327, 영구혁명)
차라투스트라는 긍정을 의미하며, 부정을 하나의 양태로, 인간을 (<뛰어넘는 것sur-saute>이 아니라) 극복되기를 원하는 하나의 적극적 존재로 만드는 힘으로서의 긍정의 정신을 의미한다. (p.329, 꽃이 피고 지듯이)
되돌아오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해서 떠밀린 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그가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자기자신을 결정하면서 다른 것들을 결정하는, 순간의 활동이다. (p.331, '나'라는 건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 되는 것이 아닌 '너'를 향한 시선에서 정의 되는 거야.)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키고,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전환시키며, (주사위) 전지기 놀이는 저속한 것을 고귀한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에 결부된 춤, 웃음, 놀이는 반영과 발전의 긍정적인 힘들이다. 춤은 생성과 존재의 생성을 긍정하고, 웃음, 폭소는 다수와 다수의 하나를 긍정하며,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긍정한다. (p.332, 아가페, 데카당스, 아낭케 / 문수, 관음, 보현 / 아리아드네, 드라우파디, 세헤라자데)
한쪽(공)이 다른 쪽(용)을 위해서 존재하고, 한 쪽이 다른 쪽 속에 존재(쟁)한다는 것은, 영원회귀가 존재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존재는 선택(기책사)이다. 긍정은 권력의지(서사)의 유일한 성질로, 작용은 힘puissance(사랑)의 유일한 성질로, 적극적 생성(서사시)은 권력과 의욕의 창조적 동일성(미학)으로 존재한다. (p.337, 합일 될 수 없는 합일)